낯선 길 위에서
크로아티아 ③

▲ 두브로브니크의 고성.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아드리아해. 그 풍경 속을 갈매기가 날고 있다.

오렌지색 가로등이 어두운 거리의 가파른 계단을 비추던 자정 무렵. 숙소로 돌아갔다.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두브로브니크는 활기 넘치는 낮과 달리 고요한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민박집 문을 여니 낮에 본 사내가 거실에 혼자 앉아 포도주를 마시고 있다. 한국이었으면 “함께 한잔 할까요”라고 청했을 테지만, 붉어진 그의 눈동자와 어두운 표정을 마주 보기 어색했다. 가벼운 인사만을 남기고 방에 들어가 깊은 잠에 들었다. 무엇인지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지만 남자의 가슴에 새겨진 지울 수 없는 생채기가 짐작되던 밤이었다.

그리고, 아침. 귀가한 여주인이 레몬차를 만들어줬다. 한국식 해장국만은 못했지만, 윙윙거리는 두통이 멀리로 물러나는 기분이었다. 크로아티아 사람들의 배려와 마음씀씀이가 따뜻하다고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녀의 남편은 어젯밤의 과음 때문인지 해가 중천에 떠오르도록 기척이 없었다.

두브로브니크에서 보낸 둘째 날도 즐거웠다. 고적하고 조용한 해변을 찾아나서는 발걸음은 가벼웠고, 낯설지만 아름다운 풍경들은 여행자의 감성을 자극했다. 피크닉 온 현지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그들의 점심식사 자리에 차려진 크로아티아식 샐러드를 한 접시 얻어먹기도 했다. 파도 잔잔한 바다에서 헤엄치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부모의 애정 어린 눈빛은 크로아티아와 한국이 다르지 않았다.

항구에서 배를 타면 30분 만에 도착할 수 있는 섬 `로크룸`에서 보낸 오후도 기억에 남는다. 어떤 동화책에서 힌트를 얻은 것일까? 그 섬엔 공작새 수백 마리를 풀어놓고 기르고 있었다. 찰랑거리는 금발머리의 꼬마들이 신기해하며 공작의 예쁘장한 꼬리 깃털을 뽑으려 종종거렸다.

아름다움은 두브로브니크 곳곳에 산재해있었다. 깨끗한 바다와 고풍스런 건축물, 멋들어진 중세 성곽과 낭만 가득한 주위의 섬들. 그러나, 아름다움 곁에는 언제나 잠복한 슬픔의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지 않았던가.

올드타운으로 돌아와선 대를 이어온 유서 깊은 식당에서 독특한 향과 맛을 가진 `앤초비 피자`를 먹고, 숙소 근처 언덕에 올라 석양을 바라봤다. 붉은 지붕과 붉은 태양, 푸른 바다와 푸른 하늘. 천상의 풍경이었다. 딱딱한 경상도 사내의 성정이 부드러워지는 느낌이었다.

낯선 도시를 헤매 다닌 피로감 탓일까. 그날은 일찍 잠들었다. 곤한 잠에서 깨어난 건 남자의 취기 어린 목소리와 여자의 울음소리 때문이었다. 주인 사내와 아내였다. 크로아티아 말을 알아듣지 못하지만 상황은 충분히 짐작됐다. 새벽 4시에 남자가 언성을 높인다거나 여성이 눈물을 보인다는 건 부부싸움이 분명했다. 한참을 이어지던 남자의 성난 목소리와 여자의 소리 죽인 울음은 동이 터올 무렵이 돼서야 잦아들었다.

 

▲ 두브로브니크 고성에서 내려다본 도시의 전경.<br /><br />
▲ 두브로브니크 고성에서 내려다본 도시의 전경.

부부싸움의 이유를 알려준 건 여자였다. 오래된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그녀는 기자의 얼굴에서 궁금증을 읽어낸 듯했다. 빨갛게 충혈된 눈동자로 이런 말을 전했다.

“잠을 깨워 미안해요. 남편은 착한 사람인데, 가끔 술에 취하면 못 견디게 힘들어지나 봐요. 젊은 시절 전쟁에 나갔었는데... 그 상처 때문일 거예요.”

그랬다. 전쟁이 준 정신적 상처 탓이었다. 이른바 `크로아티아 내전`. 1990년대 초반 종교와 인종이 달랐던 유고슬라비아 연방국들은 갈등의 불길에 휩싸였다. 그 불길은 전쟁으로 옮겨 붙었고, 크로아티아 역시 그 화마를 피해가지 못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원치 않는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내전은 몇 년에 걸쳐 나라를 바꿔가며 계속됐다. 발칸반도가 `유럽의 화약고`라 불리던 시절이었다.

세르비아정교도들은 수만 명의 가톨릭교도와 이슬람교도를 무자비하게 학살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입에 담기에 끔찍한 여성학대도 곳곳에서 발생했다. 히틀러의 유대인학살만큼 잔혹한 제노사이드(genocide)였다. 크로아티아 또한 1년이 넘는 시간을 그 지옥불 속에서 견뎌야했다.

민박집 주인 사내가 터지는 포탄과 피 묻은 칼, 증오와 보복살인이 넘쳐나던 크로아티아 내전에 군인으로 동원됐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20대 초반.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얼마나 잔인한 광경을 많이 봐야했을까.

전쟁은 상대를 죽이거나 무력으로 제압해야만 자신이 살아날 수 있는 극단적 상황으로 인간을 내몬다. 장기간에 걸쳐 계속되는 비인간적인 공포는 사람의 내면을 황무지로 만들어버리기에 충분하다. 그게 부정할 수 없는 전쟁의 본질이다. 크로아티아 내전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 역사적 상처를 모르는 꼬마숙녀가 두브로브니크 거리에서 바이올린 연주에 맞춰<br /><br />  앙증맞은 춤을 추고 있다.<br /><br />
▲ 역사적 상처를 모르는 꼬마숙녀가 두브로브니크 거리에서 바이올린 연주에 맞춰 앙증맞은 춤을 추고 있다.

민박집 주인 남자는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 세르비아 군인들을 죽였거나, 함께 참전한 전우가 자신의 눈앞에서 전사하는 걸 지켜봐야했던 게 아닐까. 아니, 꼭 그렇게 극단적인 입장에 처하지 않았더라도 전쟁은 인간을 완벽히 다른 성격의 존재로 바꿔버리고도 남을 악마적인 힘을 지녔다. 발칸반도의 비극적인 과거가 한 인간을 철저히 파괴해버린 것이다. 측은하고 마음 아팠다.

누구라도 마찬가지다. 내전의 시기에 크로아티아에 있었다면 기자 역시 유사한 전쟁체험을 했을 것이다. 전쟁이란 개인의 의지만으로 피해지는 것이 아니므로. 방에서 잠들어 있는 주인 사내를 깨워 위로를 전하고 싶었다. 그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진 연민의 감정이었다.

아름다운 크로아티아 땅 도처에 잠복한 역사의 상처. 대체 무엇이 있어 전쟁의 기억으로 고통 받는 개인을 온전히 치료해줄 것인가. 아드리아해의 아름다움에 가려진 크로아티아 사람들의 생채기를 떠올리면 지금도 마음이 천근만근 무겁다.

두브로브니크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바닷가 언덕에 올라 생소한 이름의 위스키를 마셨다. 민박집 주인 남자와 여자를 생각하니 마신 술의 취기는 즐거움이 아닌 우울함을 불렀다. 그러나, 여행자가 마냥 슬픔에만 빠져있을 수는 없는 일. 또 다른 `아드리아해의 보석` 스플리트가 멀리서 손짓하고 있었다.

 

▲ 가지런히 줄을 맞춘 요트가 늘어선 두브로브니크 항구.
▲ 가지런히 줄을 맞춘 요트가 늘어선 두브로브니크 항구.

발칸반도에선 가능하면 종교 이야기는…

발칸반도에 속한 나라들, 즉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코소보 등은 1990년대 초반 혹독한 내전을 겪었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붕괴하면서 각각의 국가들은 분리·독립을 선언했다. 이 과정에서 어제까지 술잔을 기울이며 어울리던 이웃사람들이 서로에게 총을 쏘고 칼을 휘둘렀다. 인종과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에서였다.

발칸반도 내에는 다양한 종교가 존재한다. 세르비아정교, 가톨릭, 이슬람교 등. 내전 시기엔 정교회 신자들이 무슬림과 가톨릭교도를 무자비하게 학살했고, 역사를 거슬러 올라 이슬람이 권력을 거머쥐었던 시대엔 무슬림이 타 종교를 가진 이들을 학대하기도 했다.

이러한 `발칸반도 내전`의 불씨가 사그라진 건 불과 20년도 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인종청소`라는 이름으로 학살을 주도한 정치인은 국제전범재판소에 의해 기소되기도 했다. 그들의 재판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여행을 하다보면 각기 다른 종교를 가진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과 교류하게 된다. 여행지에서 만난 이들과는 급속도로 친해지는 경우도 흔하다. 그러나, 친절하게 자신을 대한다고 해서 종교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 논쟁을 하다가는 낭패를 겪기 쉽다. 어느 시대 할 것 없이 종교는 평화와 사랑의 이념이기도 했지만, 갈등과 분열의 이유가 될 수도 있는 법.

종교와 인종 관련 화제 외에도 여행자들의 이야깃거리는 무궁무진하다. 독특한 문화와 음식, 전통음악과 영화 등을 소재로 이야기를 나눠도 얼마든지 즐거울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겐 매우 심각한 주제가 될 수도 있는 종교와 인종에 관한 논쟁은 피하는 게 발칸반도를 즐겁게 여행하기 위한 노하우다.

사진제공/류태규

국장席 홍성식 기자/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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