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형<br /><br />시인·산자연중 교사
▲ 이주형 시인·산자연중 교사

지난 주말 같이 텔레비전을 보던 아이가 갑자기 묻는다. “아빠 옛날 드라마는 왜 저렇게 구려?” 아이는 “구리다”를 어떻게 정의할지 궁금했다. “나경아 구린 게 뭐야?” 아이는 주저하지 않고 이야기해 주었다. “구린 거는 뭔가 좀 이상한 거야. 지금 시대에 안 맞는 게 구린 거지.” 초등학교 3학년 아이에게 또 한 수 배웠다.

세상을 보는 눈이 어른보다 더 정확한 아이에게 지금 세상에서 뭐가 제일 구린지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왜냐하면 굳이 묻지 않아도 구린 것을, 그것도 완전 구린 것을 금방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지난 주말 언론을 후끈 달군 국회다.

필자는 정말 세상에서 가장 비열한 웃음을 지난 주말에 보았다. 힘 대결에서 이긴 다수당 국회의원들이 떼로 자리에 앉아 웃어대는 웃음. 뭔가 해냈다는 거만한 태도로 자리에 앉아 떼거리로 웃어대는 웃음은 정말 구려도 너무 구렸다.

나르시즘(自己愛)에 빠진 그들을 과연 국민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다른 국민들이야 어떻게 생각하지는 모르겠지만 필자는 나경이의 표현처럼 정말 구려 보였다. 자기도취에 빠져 좋아 어쩔 줄 모르는 그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싶지만 필자의 사전에는 그 단어가 없다. 그래서 초등학교 3학년 나경이의 표현을 빌려 표현한다. “구려도 너무 너무 구리다!”

정말 국회에 있는 그분들은 모르는 걸까. 국민들은 더 이상 그분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믿고 안 믿고를 떠나 들을 생각조차 없다는 것을. 누구를 위한 국회인지, 무엇을 위한 반대인지. 입만 열었다 하면 거짓말을 하는, 만나기만 하면 싸우는 그분들이 있는 국회는 야생(野生) 중에도 약육강식의 원리가 치열하게 존재하는 가장 원시적인 야생이다.

여의도에서 야생적인 삶을 사는 한 분이 말한다. “협치(協治)는 항상 있는 게 아니다. 그 때 그 때 다르다.”

과연 그들이 말하는 협치란 무엇이길래 그 때 그 때 다를까. 협치를 누군가는 “타협정치(妥協政治)”의 줄임말로 해석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협력의 정치”, “협의의 정치”라고도 정의한다. 과연 지금 정치인들이 말하는 협치라는 것이 이와 같은 뜻이라면 결코 그 때 그 때 달라서는 안 될 것이다. 정치가 무슨 코미디 프로그램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 때 그 때 다를까.

또 다른 야생인은 말한다. “어떤 이유로도 국정감사를 보이콧하는 것은 국민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정말 옳은 말이다. 보이콧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정치는 국민의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이런 말을 하는 그 사람들도 한 때는 아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보이콧을 밥 먹듯이 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이 바른 말을 하는 그들을 보고 웃는 이유이다. 정말 언제부터 그들이 국민을 생각했을까. 기름기 좌르르 흐르는 그분들의 얼굴에 뜬 웃음을 보니 춘향가 한 대목이 떠올랐다.

“금준미주 천인혈(樽美酒 千人血-금동이의 맛있는 술은 백성의 피요), 옥반가효 만성고(玉盤佳肴 萬性膏-옥쟁반의 기름진 안주는 백성의 기름이니), 촉루락시 민루락(燭淚落時 民淚落-촛농이 떨어질 때 백성이 눈물 쏟고), 가성고처 원성고(歌聲高處 怨聲高-노래 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도 높더라.)”

옛 말 그른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을 필자는 이번에도 실감했다. 야생의 그분들이 지난주에 거사를 마치고 마신 술은 분명 국민들의 피일 것이다. 그리고 그분들의 기름진 얼굴은 백성들의 기름일 것이며, 그분들이 한껏 웃고 있을 때 국민들의 원망 소리는 한없이 높을 것이다. 비록 지금이야 떼거리로 뭔가를 밀어 붙일 수 있겠지만, 국민들은 그들이 곧 여러 개로 나뉘어 이전투구(泥田鬪狗)할 것을 안다. 완전 구린 야생 국회에 한 마디만 한다.

“국민들은 그대들이 지난 국회에서 한 치졸하고 비열한 일을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