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길 위에서 인도 ①

▲ 인도를 상징하는 풍경처럼 설명되는 바라나시. `성스러운 강`으로 불리는 곳에서 몸을 씻는 사람들.

초등학교 6학년 때쯤으로 기억된다. 엄마를 따라 놀러간 경상남도 삼랑진 작은 마을에서 외갓집 구들장을 해체하는 작업을 우연찮게 지켜봤다. 1983년 혹은, 1984년 무렵이다.

황토와 볏짚으로 잘 반죽한 단단한 흙덩이들이 몇 번의 곡괭이질과 삽질에 맨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말 그대로 무너지는 흙바닥. 묵은 먼지가 공중으로 비산했다. 콩나물해장국의 감칠맛을 위해 할머니의 손바닥에서 “바스락” 부서지던 새빨간 마른고추 분말처럼.

시간을 뛰어넘는 타임머신 타 듯
`옛날식 정취` 찾아 떠난 인도

큰 땅덩어리·낙후된 교통수단
마음·욕심 다 비우고
거대한 인도여행을 시작하다

외가는 엄마가 멀고 먼 바닷가 도시로 시집가기 전 23년 하고도 몇 개월을 더 머문 곳이다. 그 구들장 위에서 어린 동생들을 돌보며 유년을 보낸 엄마와 30대 초반에 남편을 잃고 홀로 5남매를 키웠던 외조모의 가파른 생을 떠올리니 백석(1912~1996)의 시 한 구절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여승(女僧)`이다.

 

▲ 인도의 대표적 건축물 중 하나인 타지마할 궁전.
▲ 인도의 대표적 건축물 중 하나인 타지마할 궁전.

섶벌같이 집 나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山)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山)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고향마을에서 자신이 살았던 집의 따스한 아랫목이 허물어지는 걸 지켜보며 엄마는 말이 없었다. 눈망울이 허했다.

하지만, 아무리 돌아가고 싶어도 과거는 과거일 뿐, 그리움만으론 추억이 실체로 복원되지 않는다. 풀 뜯어 염소 먹이고, 차가운 개울에서 기저귀 빨며, 일 나간 외할머니 대신 갓 돌 지난 막내를 업어 키우던 엄마의 추억이 먼지처럼 혹은, 마른고추 분말처럼 흩날리는 그곳에서 기자는 그녀에게 과거를 돌려주고 싶어졌다. 가난과 슬픔의 힘으로도 결코 지워낼 수 없는 명백한 기억.

사람은 인정하건 부정하건 기억 속을 산다. 엄마는 일찌감치 그걸 알아차린 사람이다. 하여, 그녀의 아들인 기자는 현재나 미래보단 과거를 흠모하는 사람이 됐다. “나는 과거를 돌아보며 한숨짓는 걸 체질적으로 싫어해!”라고 일갈한 고은(1933~) 시인이 보자면 혀를 찰 일이지만, 어쩔 것인가.

엄마를 닮은 `과거를 흠모하는 소년`은 자랐다. 소금기 가득한 바닷물에서도 겁 없이 뿌리를 내리는 맹그로브처럼.

 

▲ 현대적 교통수단인 택시와 낡은 인력거(릭샤)가 동시에 도로를 달리는 나라가 인도다.
▲ 현대적 교통수단인 택시와 낡은 인력거(릭샤)가 동시에 도로를 달리는 나라가 인도다.

서른이 넘기 시작하자 소년은 자신이 사랑하는 `과거`의 풍광을 지닌 곳으로 떠나기 위해 해마다 한두 번 혹은, 1~2년에 한번쯤 여행 가방을 꾸렸다.

여타의 여행자들처럼 대형배낭도 아니었다. 중고등학생들이 책가방으로 이용하는 가로 30cm 세로 50cm가 넘지 않는 그야말로 `조그만 보따리`.

그것 하나 달랑 메고 `과거의 아름다움`을 아는 엄마가 가지 못한 길을 홀로 짚어가며 `과거의 풍광`을 찾아다녔다. 그곳이 바다이건, 강이건, 호수이건. 모자(母子)는 `물`을 좋아하는 것까지 닮아있었다. 그렇게 다녀온 곳이 태국과 라오스, 베트남과 캄보디아, 일본과 이란, 필리핀과 몽골, 터키와 불가리아 등이었다.

거기서 만나는 풍경과 사람들이 좋았다. 온종일 해먹에 누워 원시의 풍광을 지닌 바다와 강을 바라보며 자신이 처한 팍팍한 상황과는 관계없이 선량하게 웃을 줄 아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즐거웠다. 그 즐거움이 여행 취향을 고착시켰다. 그 `고착`이 싫지 않았다.

인도여행을 결정한 것은 위에서 언급한 것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한두 군데 직장을 거쳐, 인터넷신문에서의 기자생활이 6년에 이르던 시점. 1개월간의 휴가를 사용할 수 있게 됐다.

 

▲ 관광객을 태우고 나룻배로 갠지스강을 오가는 인도 청년.
▲ 관광객을 태우고 나룻배로 갠지스강을 오가는 인도 청년.

감성 가득하고, 관용 넘치는 사람들이 산다는 프랑스 파리에서 문학청년 시절 그토록 닮고 싶어 했던 아르튀르 랭보(1854~1891)처럼 한 달만 살아보고 싶다는 열망도 없지 않았지만 그것은 `과거 흠모`의 지향을 이기지 못했다.

기자가 여행한 어떤 나라, 어느 도시보다 `옛날식 정취와 인정`을 볼 수 있는 곳이 인도라고 생각했다.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우리의 현재는 인도의 과거보다 아름답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에 관해선 설명할 시간이 있을 것이다.

살아오는 내내 기자는 1983년 혹은, 1984년 외갓집 구들장이 무너지는 장면을 엄마와 함께 바라본 바로 그 시간, 우울하고 먹먹했지만 또한 한없이 따스했던 기억 속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못 말리는 과거지향”이라 욕을 먹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국경을 오가는 비행기란 `시간을 뛰어넘는 유사 타임머신`이다. 여기에 몸을 싣고 짧게는 3~4시간, 길게는 10시간쯤의 지겨움을 견뎌준다면 그 `유사 타임머신`은 기자가 살아보지 못했던 1960년대 혹은, 더 이전의 시간들 속으로 나를 데려가준다. 비행기란 분명 매력적인 `문명의 선물`이다.

우여곡절 끝에 인도여행을 결정했지만, 문제는 거기부터 시작이었다. 남북한을 합친 것보다 수십 배가 더 큰 땅덩어리, 게다가 교통수단도 낙후된 탓에 도시 사이를 이동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정보. 여기에 “인도에서의 한 달 여행은 한국의 2박3일 벼락치기 관광보다 짧게 느껴진다”는 풍문을 어렵잖게 얻어들을 수 있었다.

심플해지기로 했다. 평생을 투자해도 모두 다 눈에 담을 수 없는 거대한 나라의 풍광 전체를 한 달 만에 보겠다는 욕심을 버리는 것에서부터 인도여행은 시작됐다.

 

▲ 자신들이 바라보는 것이 `성스러운 갠지스강`임을 개들도 알고 있을까?
▲ 자신들이 바라보는 것이 `성스러운 갠지스강`임을 개들도 알고 있을까?

인도는…

01세기 동안 영국의 식민지, 1947년 독립
힌두어·영어 공용
화폐 단위는 루피… 우리 돈 1천원은 약 60루피

남부 아시아에 위치한 국가로 1857년 무굴제국이 멸망한 후 영국의 식민지로 편입됐다. 한 세기에 가까운 기간을 영국의 정치·경제적 지배를 받다가 1947년에야 독립했다. 이런 이유로 아직까지 영국식민지 시절의 모습이 사회 각 분야에 적지 않게 남아있다.

정식 명칭은 인도공화국(Republic of India). 힌디어로는 바라트(Bharat)라고 표기한다. 서쪽엔 파키스탄, 북동쪽엔 중국과 네팔, 동쪽엔 방글라데시와 미얀마가 자리하고 있다. 인접국인 중국과 심각한 국경분쟁을 겪었고, 1962년엔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종교가 다른 파키스탄과도 카슈미르 지역 영토분쟁을 포함한 갈등을 겪고 있다.

불교가 태동한 지역이며, 예전엔 천축(天竺)이라 불리기도 한 나라다. 국토 면적(328만7천263㎢)이 세계에서 7번째로 넓고, 인구(12억 명)도 중국에 이어 세계 2위. 행정구역은 28개 주(state)와 7개 연합주(union territory)로 구성됐다.

수도는 델리. 또 다른 대도시인 뭄바이는 `인도의 경제수도`라고 불리기도 한다. 인도 아리아족이 인구의 72% 이상을 차지하고, 숫자에 있어서는 드라비다족과 몽고족이 뒤를 잇는다. 힌두어와 함께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80%가 넘는 사람들이 힌두교도며, 이슬람교(13.4%)와 기독교(2.3%)를 믿는 이들도 있다. 화폐단위는 루피(Rupee)로 한국 돈 1천원은 약 60루피. 외교적으로는 한국과 북한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으나, 최근엔 국력과 경제적 측면에서 괄목할만한 성장을 보이고 있는 한국과의 관계에 더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공식적인 한국-인도간 외교관계가 수립된 것은 1973년. 한국에서 철강과 시멘트 등의 중간재를 수입하고, 철광석과 원면, 피혁제품 등을 수출한다.

나라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힌두사원과 이슬람교당, 석굴사원과 고대 문명의 흔적은 인도를 `신비롭고 아름다운 공간`으로 여행자들의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드넓은 땅덩어리로 인해 남부와 북부, 동부와 서부간의 문화 차이가 크다. 그것이 관광객들에겐 매력으로 다가온다. 한 나라에서 여러 문화를 만날 수 있는 것.

순박하고 세파에 찌들지 않은 대다수의 인도 사람들은 외국인을 호의적으로 맞아준다. 환한 웃음으로 베푸는 친절과 배려는 낯선 환경에 곤혹스러움을 느낄 이방인들을 따스하게 위로한다. 한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물가 또한 여행하기 편한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제공/류태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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