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길 위에서
인도 ②

▲ 인도 시골마을의 저물녘 풍경. 고요하고 평화롭다.

마침내 인도행 비행기를 타는 날이 왔다. 그날 아침도 사람들은 출근버스 혹은, 전철을 기다리며 어젯밤의 숙취와 피곤이 덜 풀린 얼굴로 정류장과 플랫폼을 서성이고 있었다.

`사는 게 별 게 아닌데 다들 저렇게 도살장 끌려가는 소같은 표정으로 겨우겨우 삶을 견디고 있구나`라는 것에 생각이 이르자 괜히 쓸쓸해졌다. 동시에 이성복(1952~) 시 `그날`의 몇 구절이 떠올랐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모두가 병들었는데 병들어 아프다는 사실조차도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세상. 시인의 예민한 촉수는 현대사회의 병들어 곪은 환부를 이처럼 담담하게 더듬어 노래하고 있었다.

동시에 밀려오는 자괴감. `나는 내가 병든 걸 알고 있는 사람인가?` 답하기 쉽지 않았다. 인도여행은 그 답을 찾으러 떠나는 것이라 해도 좋을 것 같았다. 인도여행 준비물에 문고판 이성복 시집도 포함시켰다.

가방을 열어 빠진 여행용품이 없나 체크하고, TV와 DVD 플레이어 전원을 뽑고, 도시가스 밸브를 확인하고 문을 나섰다. 드디어 `유사 타임머신`인 비행기를 타고 다시 한 번 시간을 넘는다. 과거로 돌아가 현재를 한 걸음 떨어져 객관화시켜 볼 수 있는 인도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시인 김수영의 진술처럼 “멀리서 먼 곳을 볼 수 있는” 시간.

 

▲ 세상 어느 곳이나 역전 풍경은 비슷하다. 인도의 바라나시 기차역.
▲ 세상 어느 곳이나 역전 풍경은 비슷하다. 인도의 바라나시 기차역.

“무지보다 경계해야 할 건 인식의 색맹이다.”

근사한 문장이다. 지금은 고등학생 딸을 키우며 단조로운 일상을 살고 있는 친구 L. 30여 년 전 그는 정열과 광기를 가진 문학청년이었다. 열여덟 살 때던가? 늦은 밤 L이 보여준 습작소설 속에서 저 문장을 발견했고, 이후 수십 년 세월이 지났음에도 문장이 주는 현재성은 기자에게 여전하다. 인도를 향하던 기자는 이 글귀를 다시 떠올렸다. 그리고, 새삼 다짐했다. `자신이 아는 것만을 전부로 생각하는 바보가 되지 말자`고. 인식의 색맹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다양성의 통로를 열어놓고, 존재하는 사물 자체의 이면까지를 들여다보려는 노력밖에 없지 않은가. 우리가 비록 사르트르(Jean Paul Sartre·1905~1980)의 전언처럼 “우연히, 무상히 이 땅에 털어진 피투성의 존재”일지라도.

 

▲ 소와 개, 사람들이 자연스레 어울려 살아가는 인도의 마을 풍경.
▲ 소와 개, 사람들이 자연스레 어울려 살아가는 인도의 마을 풍경.

이제껏 책과 풍문을 통해 체득한 인도에 대한 사전 정보 모두는 여기, 이 땅에 두고 마음을 비운 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인도를 먼저 여행한 몇몇 사람들이 글과 말을 통해 유포하는 편견과 선입견은 인식의 색맹을 부르는 무서운 부젓가락이다. 제 눈을 찌르기에 딱 좋은.

한국어판 인도여행 가이드북 `론리 플래닛`과 이성복 시집, 반바지 하나에 반팔 티셔츠 2개, 조그만 디지털카메라, 여권과 환전한 달러가 인도여행 한 달을 위한 준비물의 전부였다. 수천km 떨어진 외국이 아닌 뒷동네로 산책 가는 모습이었다. 마침내, 탑승 안내방송이 귀에 들려왔다. 에어인디아 승무원은 한국 스튜어디스와는 전혀 다른 편안한 복장과 푸근한 몸피로 기자를 맞아주었다. 인도의 향기(?)로 가득한 기내식도 먹었다. 첫 번째 경우지인 홍콩까지는 대략 2시간 30분 정도가 걸렸다. 그제서야 주위를 꼼꼼히 둘러봤다. 인도로 가는 한국 여행객이 적지 않다. 대부분은 기자보다 10살 이상이 어린 친구들로 보였다. 놀라웠던 건 남자보다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여학생들의 숫자가 훨씬 많았다는 것. 그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밝고 맑아서 참 보기 좋았다. 하지만, 그들이라고 왜 고민과 방황이 없겠는가. 사람이란 다들 평생을 살아도 해결할 수 없는 내밀한 비밀과 수수께끼 하나쯤은 지니고 사는데. 다만, 그 비밀과 수수께끼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을 뿐.

 

▲ 인도엔 힌두양식과 이슬람양식으로 축조된 거대한 건축물들이 흔하다.
▲ 인도엔 힌두양식과 이슬람양식으로 축조된 거대한 건축물들이 흔하다.

그들 또한 청년실업과 20:80사회, 88만원 세대와 비정규직 등의 단어가 주는 중압감에 매일같이 시달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홍콩을 출발해 두 번째 경우지인 델리에 도착한 비행기는 다시 한 시간 남짓 급유와 안전 점검을 마친 후 최종 기착지 뭄바이를 향해 엔진소리를 높였다. 많은 한국인 여행객들이 델리에서 내렸다. 그들은 거기에서부터 인도여행을 시작할 터였다. 젊기에 더 큰 가능성이 열려있는 20대 청년들에게 소설가 황석영(1943~)을 흉내내 이런 응원을 마음속으로나마 전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때려치운다고 너를 욕하는 어른들의 손가락질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들은 네가 무얼 잘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네가 하고 싶은 일만 하기에도 생은 턱없이 짧다. 지상에 유토피아는 없다. 네 영혼이 들려주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 소리를 따라가라. 결국 낙원이란 네 바깥이 아닌 내부에 있는 것이다.”

▲ 자전거를 개조한 사이클릭샤는 인도의 주요 교통수단 중 하나다.
▲ 자전거를 개조한 사이클릭샤는 인도의 주요 교통수단 중 하나다.
인도의 독특한 교통수단 `릭샤`를 타보셨나요

오로지
사람의 힘으로 끄는
자전거 개조한 인력거

도움 주고싶지만
힘겨워하는 모습에
맘 편히 타지는 못해

인도를 포함한 아시아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교통수단이 있으니 바로 릭샤(Rickshaw)다.

통상 `인력거`라고 번역되지만, 방글라데시와 태국, 캄보디아와 라오스 등지에서는 사람이 끄는 힘으로 달리는 것이 아닌 오토바이를 개조한 형태의 릭샤들이 주를 이룬다. 택시나 버스 등의 대중교통에 익숙한 한국이나 일본 관광객들에게는 `릭샤`로 이동하는 자체가 여행의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방콕, 프놈펜, 비엔티안, 시엠립, 다카 등의 도시엔 오늘도 수천 대의 `오토 릭샤`(auto-rickshaw·오토바이를 개조한 교통수단)가 도로 위를 달리고 있다. 사람이 끄는 인력거 형태의 릭샤와 자전거를 개조한 `싸이클 릭샤`(Cycle-rickshaw)는 이제 인도가 아니면 보기 힘들어졌다.

처음 인도에 도착한 사람들은 신기해하며 얼씨구나 릭샤에 오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하는 이들이 많다. 조그만 체구에 야윈 다리로 릭샤를 끄는 릭샤왈라(인력거꾼)의 등이 온통 땀으로 젖어드는 것을 보는 순간부터다.

기자의 경우도 인도 남부의 한 도시에서 싸이클 릭샤에 올라 1km쯤을 간 적이 있다. 평지에서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릭샤왈라가 오르막길이 나타나자 숨을 몰아쉬며 종아리 근육이 불거지도록 페달을 밟는 걸 보며 가슴 한구석이 뭉클했던 경험이 있다.

 

▲ TV 프로그램 제작진들이 인도의 릭샤왈라를 취재하고 있다.
▲ TV 프로그램 제작진들이 인도의 릭샤왈라를 취재하고 있다.

낡은 자전거와 낡은 슬리퍼, 늙은 릭샤왈라가 지나온 만만치 않았을 세월이 자연스레 상상됐기 때문이었다. 사실 인도에서 인력거나 싸이클 릭샤를 타느냐, 마느냐는 복잡한 문제다. 릭샤왈라의 육체적 힘겨움을 생각하면 타지 않는 게 옳지만, 그들은 릭샤를 타는 손님이 지불하는 푼돈으로 그날 가족들이 먹을 밥과 반찬거리를 구한다. 릭샤에 오르자니 마음이 아프고, 외면하자니 릭샤왈라의 애절한 손짓을 외면하기가 힘들다. 이런 게 바로 인도여행의 딜레마(dilemma) 중 하나다.

다행히 최근엔 인도 정부에서도 릭샤를 비인간적인 교통수단이라 판단해 이를 차츰 없애고 오토 릭샤 등으로 교체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앞으로는 인도의 인력거꾼인 릭샤왈라들을 보기가 힘들어질 듯하다. 현재 남아있는 릭샤왈라들은 그 희귀성 탓에 해외 여행지의 독특한 문물을 소개하는 TV 프로그램이나 다큐멘터리에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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