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주영 수필가
청포도를 산다. 입에 넣었을 때 느껴지는 맛, 단맛과 신맛의 조화로움이 미각을 자극한다. 새콤달콤한 맛이 좋아 청포도를 사게 된다. 내가 처음 청포도를 먹었던 것은 열 살쯤 여름방학 때였다. 아버지께서 마당에 열린 포도를 한 알을 따서 입어 넣어주셨던 그 맛. 달달하고 새콤한 맛의 기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어렸을 때 먹었던 그 맛이 아닌 줄 알면서도 샀다.

상큼하고 싱그러운 맛이 입 안 가득 번지고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알알이 맺힌다. 아버지가 들려주었던 노래들이 그리워진다. 흘러간 옛 노래를 들으면 어린 시절 아버지 곁에서 조잘거리는 어린아이가 되는 듯하다. 그 작은 꼬마아이가 이제는 술을 한 잔 하며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있다. 나의 첫사랑은 아버지이다. 새콤하고 풋풋한 날의 기억. 아버지와 함께 했던 추억들이 떠오른다.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셨고 은방울자매의 노래를 좋아하셨다. 그래서 어머니는 포도가 나오는 계절이 되면 꼭 포도주를 담그셨다. 어릴 적 술에 절여진 포도를 먹고 취했던 기억이 떠올라 빙긋이 웃어본다. 마루 끝에 누워서 아버지가 듣고 계시던 노래를 따라 흥얼거렸다. 그날 나는 기분 좋게 취했다.

노랫가락에 취하고 그리움에 취한다. 은방울 자매의 `첫사랑에 취한 맛`을 듣는다. `사랑이 많다해도 첫사랑만 못해요 첫사랑에 취한 맛 달콤한 포항포도주` 노랫가락에 흘러나오는 포도주는 어떤 맛이었을까? 수입와인을 마시며 지금은 사라져버린 술맛이 궁금해진다. 화이트와인의 주재료는 청포도이다. 씨나 껍질을 넣지 않고 포도즙만을 숙성해서 만들어 상큼하고 향긋하다.

청포도 향 그윽한 술과 그리움에 취하니 `청포도`시가 읊조려진다. `내 고장 칠월은/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시인은 고향에 함께 지낼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청포도에 담았다. 시인의 고향은 안동이다. 하지만 시인은 결핵요양차 포항의 송도원에 머물렀다. 그때 일월동에 있는 포도밭을 구경하고 시상을 떠올려 시를 썼다고 한다. 일제의 암울한 시대에 밝은 내일의 기다림과 염원을 담아 쓴 시(詩). 민족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마음을 청포도에 상징하여 개인의 서정으로 잘 표현한 시이다. `청포도`의 시에 나오는 바다는 포항 바다이다. 하지만 시의 배경이 포항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애국정신의 숭고함을 기억하고자 포항에는 청포도 시비가 세군데 있다. 푸른 바다가 보이는 동해면 일월동 옛 포도밭에서 시를 쓰는 시인의 모습을 호미곶에 있는 시비 앞에서 시를 읊조리며 상상해보기도 했다.

노랫가락과 문학작품에는 있는 포도밭이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도시가 개발되면서 많은 것들이 사라졌다. 포도밭도 그 중 하나 일 것이다. 해방이후 포항에서 생산된 포도주는 국내외에 알려졌고 국내 최초 해외수출 기념 음반까지 내었다고 한다. 와인을 좋아하다보니 국내에서 생산되는 와인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 한 적이 있다. 그 때 처음으로 국내와인을 마셔보았다. 한국적인 독특한 맛이 있었다. 같은 품종의 포도로 만들어도 술맛은 지역마다 다르다. 술마다 독특한 향과 맛이 그 지역의 대표음식과 잘 어울렸다.

생선요리와 잘 어울리는 와인이 생산되는 지역은 수천 년 전 바다였던 토양도 있다. 술맛은 포도가 생산되는 토양, 기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포항에서 생산된 청포도로 만든 술맛은 어땠을까? 바다 향이 담긴 청포도로 만든 와인은 생선회와 잘 어울릴 것 같다. 아버지는 생선회를 무척 좋아하셨다. 회를 드실 때는 어머니가 담근 포도주와 함께 드셨다. 아버지와 술을 한 잔 마시며 이야기하고 싶다. 하지만….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으려나. 함께 했던 바닷가의 추억들이 푸르게 일렁인다. 어린 시절 청포도 같은 새콤달콤한 날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