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머링 맨 시민광장. 망치를 든 오른팔은 왼손의 모루에 닿을 수 없다. 그의 일은 한낱 제스처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의 모든 일이 이런 몸짓을 닮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거대한 발 뒤편으로 검은 등뼈 같은 물줄기가 흐르고, 이 거대한 남자는 고개를 돌려 발아래를 내려다볼 틈도 없다. 그렇게 하루가 저물어간다.
▲ 해머링 맨 시민광장. 망치를 든 오른팔은 왼손의 모루에 닿을 수 없다. 그의 일은 한낱 제스처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의 모든 일이 이런 몸짓을 닮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거대한 발 뒤편으로 검은 등뼈 같은 물줄기가 흐르고, 이 거대한 남자는 고개를 돌려 발아래를 내려다볼 틈도 없다. 그렇게 하루가 저물어간다.

오늘은 광화문에서 영화를 보았다. 가을은 거리에 즐비하다. 바스러지는 가을을 밟으며 쌀쌀하진 거리를 걷는다. `해머링 맨 시민광장`으로 들어선다. 이곳은 2008년 8월 `도시를 작품으로 만드는 데 도전하는 서울시 도시갤러리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조성되었다. 시민광장에는 브롭스키가 만든 22m 높이의 `해머링 맨`과 네덜란드 건축그룹 매카누에 만들어진 `강 같은 길`로 구성되어 있다. 서울시는 이 광장의 취지가 “시민들이 도심에서 편히 쉬면서 해머링 맨과 주변 도시경관을 향유”하는 것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나는 이곳에서 어떤 기갈과 어떤 위안을 느낀다.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 `해머링 맨`: 가 닿을 수 없음

`해머링 맨`은 높이 22m에 50t의 무게를 자랑하는 압도적인 조형물이다. 다른 조형물과 달리 이것은 움직인다. 한번 왕복할 때마다 77초가량의 시간이 소요되며 하루에 약 660번 망치질을 한다. 그러나 해머링 맨의 그 숱한 망치질 속에서 오른손은 단 한 번도 왼손에 가 닿지 않는다. 해머링 맨은 입체적이지만, 그 망치질은 이차원적이어서 늘 오른손은 왼손을 비껴지나 간다. 닿을 수 없다,는 말은 단순하게 들리지만, 그 의미는 중층적이다. 해머링 맨의 오른손이 왼손에 가 닿을 수 없듯이 화이트 칼라의 노동은 육체적 노동에 닿을 수 없다. 이러한 노동의 이질성을 해머링 맨은 등질화시킨다. 회사원들은 퇴근 후 해머링 맨을 지날 때, 땀을 흘리지 않고도 땀을 흘린 듯한 기갈을 느끼며, 그 기갈을 채우기라도 하겠다는 듯, 즐비한 술집으로 들어가 단숨에 맥주를 들이킨다.

이러한 목마름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마르크스에 따르면, 공장 노동자들은 노동의 분업이 가속화되면 될수록 자신이 만드는 상품의 제작과정, 유통 등과 같은 사회적 관계로부터 분리된다고 했다. 이것이 `소외(alienation)`다. 이러한 소외현상은 오늘날 공장노동자보다 오히려 사무직 노동자에게 더 직접적인 것처럼 보인다. 사무직 노동자의 일은 물질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숱한 사회적 관계에 의해 직조된 비물질적 덩어리며,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어 노동자는 그 연속성을 감각할 수 없다. 이러한 노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회사의 메커니즘뿐만 아니라 사회 구조 전체를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일할 시간은 있지만, 일에 대해 생각할 시간은 없다. 시간과 함께 일은 쌓인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해머링 맨의 망치질이 왼손에 닿을 수 없는 것처럼 노동자는 그들의 일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며, 그 일의 쓰임 역시도 알 수 없을 것이다. 퇴근 뒤 엄습하는 목마름은 여기에 근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강 같은 길`:가 닿을 수 있음

그렇다면 이 기갈은 해소 가능한 것일까. 오른손의 망치가 왼손에 가 닿기 위해서는 이차원에서 삼차원으로의 도약이 필요하다. 오른손이 왼손에 가 닿기 위한 모험, 차원과 차원을 건너뛰려는 이 무모함을 혁명이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그런데 여기에서 윈스턴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의식을 가질 때까지 절대로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며, 반란을 일으키게 될 때까지는 의식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조지 오웰, `1984` 중)

해머링 맨의 망치질처럼, 우리는 우리의 일의 사용을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끝없이 반복해야 한다. 우리의 일을 알 때까지 혁명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우리의 일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해머링 맨은 이 시대의 비극적 축도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혁명은 불가능하다.

 

▲ 공강일 서울대 강사
▲ 공강일 서울대 강사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으나, 거기에 메카누의 강 같은 길이 길게 누워 우리를 위무하고 있다. 강 같은 길이라고는 했으나 자세히 보면 그것은 거대한 짐승의 등뼈다. 직립한 인간의 등뼈가 아닌 네 발 짐승의 구부정한 등뼈, 이것은 파괴된 것처럼 보이나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져 유유히 흐른다. 저 구부정한 등뼈에 올라 사족보행을 했던 유구한 과거를 추억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을 꼭 도피나 회피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혁명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먼 곳에 있는 것만은 아닐 테니 말이다. 추억하기를 연습하는 일, 회사에서든, 현장에서든, 학교에서든, 집에서든, 추억에 잠기는 그 정지의 순간, 거기에 혁명이 웅크리고 있다.

※이 사업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