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길 위에서
인도 ⑦

▲ 대부분의 인도 소년들은 순박한 눈망울로 선량하게 웃는다. 그 웃음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힘`이 담겨있다.

아침 일찍부터 소년 오토릭샤 운전수 프랭키와 성스러운 고대도시 함피의 유적들을 둘러봤다. 이슬람과 힌두세력이 각축을 벌이며 서로 대립한 탓에 상당수 유물과 유적이 손상된 상태로 남아있었지만, 함피는 파괴된 폐허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무너진 바위 하나하나에 담긴 역사의 흔적들이 여행자를 매료시켰다.

무너진 바위에 새겨진 함피의 역사…폐허 속에서도 아름다움 빛나
오토릭샤 가이드 소년 프랭키의 초대로 인도가족들과 만나
할머니와 엄마·여동생과 조그만 방 한칸서 생활하는 소년가장
가난으로 일찍 철든 소년 프랭키의 미소에 기자의 삶 되돌아 봐

인도사람들처럼 걸쭉한 카레와 밀가루빵으로 점심을 먹고 오후가 되니 `살인적인 더위`가 함피의 폐허를 뒤덮었다. 길거리에 줄지어 드러누운 개들의 혀가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날씨 탓인지 잠이 쏟아졌다. 프랭키에게 “호스펫의 호텔로 돌아가자”고 부탁했다.

 

▲ 인도인들이 이용하는 낡은 기차. 전통의상을 입은 여성들이 기차에 오르고 있다.
▲ 인도인들이 이용하는 낡은 기차. 전통의상을 입은 여성들이 기차에 오르고 있다.

“나머지 유적과 좋은 경치는 내일 안내해다오. 대신 오늘 약속한 가이드 비용 500루피는 지금 주겠다”고 하니 싫어하는 눈치가 아니다.

기자를 데리고 다니지 않으면 오후엔 다른 손님을 태워 영업을 할 수 있을 것 아닌가. 건네는 지폐를 “마지막 날 받아도 된다”며 사양하는 프랭키를 호텔 앞에서 돌려보내고 객실로 올라와 달콤한 낮잠에 들었다. 꿈도 없는 평화로운 잠이었다.

해질 무렵 일어나 로비로 나가니 프랭키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집으로 놀러가기로 약속을 한 것이다. 인도 사람 집에 초대받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프랭키가 운전하는 오토릭샤 뒤에 타고 땅거미가 어둑하게 내리는 호스펫 시내를 지나 구불구불한 비포장도로를 한참 달렸다.

프랭키의 집은 북적거리는 시장 어귀에 자리 잡고 있었다. LG전자에서 생산한 낡은 텔레비전과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인 스테인리스 그릇이 차곡차곡 포개져있는 조그만 방 한 칸과 손바닥만한 마당이 집의 전부였다. 프랭키는 거기서 할머니, 엄마, 여동생과 함께 살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인도에선 여자들이 돈을 벌기가 쉽지 않아 자기가 오토릭샤를 끌고 다니며 버는 돈으로 가족의 생활비를 충당한다는 프랭키의 설명이 이어졌다. 릭샤도 자기 것이 아니라 임대한 것이기에 수입의 절반 이상은 릭샤 주인에게 줘야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 푸른 하늘빛과 잘 어울리는 함피의 담홍색 건축물.
▲ 푸른 하늘빛과 잘 어울리는 함피의 담홍색 건축물.

만약 기자가 프랭키와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어땠을까? 웃으며 세상을 살아갈 수 있었을까? 아마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나이를 마흔여섯이나 먹었음에도 기자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누구를 책임지거나, 먹여 살려본 적이 없다.

결혼을 하지 않았으니 부양할 아내와 아이들이 없고, 부모 또한 넉넉한 형편은 아니지만 남의 도움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기자는 매일같이 벌어지는 선후배,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드러내놓고 불만을 터뜨리곤 했다. “왜 나는 독일산 고급승용차와 100평짜리 주상복합아파트를 가진 부자로 태어나지 못한 거냐?”

가난은 소년을 일찍 철들게 한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남기고 간 3명의 여자를 최소한 불행하지 않게는 해줘야한다”는 열여덟 소년 프랭키의 말에 기자는 부끄러워졌다. 어린 나이에 짊어지기엔 지나치게 무거운 삶의 무게 혹은, 가혹한 운명을 기꺼이 감수하고 사는 소년. 그런 상황에서도 착한 웃음을 지을 줄 아는 프랭키는 지금 생각해보면 기자의 스승이기도 했다.

프랭키의 엄마가 들어간 설탕의 양을 가늠할 수조차 없이 달디 단 홍차와 인도 과자를 내왔다. 일종의 손님 접대였을 것이다. 기자는 초콜릿이나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한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사양할 수는 없는 일. 그건 상대방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드는 행위일 수도 있다.

 

▲ 힌두교의 신(神)들이 조각된 건물의 지붕.
▲ 힌두교의 신(神)들이 조각된 건물의 지붕.

겨우겨우 설탕물 같은 홍차 한 잔을 어렵게 비워내니, 프랭키의 엄마가 묻는다.

“맛있나? 한 잔 더 가져올 테니 마셔라.” 표정관리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또 마실 수밖에 없었다. 사발 크기에 가까운 커다란 잔으로 홍차를 연거푸 마시고나니 평소 1년 먹을 설탕을 30분 만에 해치운 느낌이었다. 아랫배가 살살 아플 정도였다.

프랭키의 할머니는 뭐가 그리 수줍은지 기자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러면서도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웃는다. 손자의 웃음과 닮은 오밀조밀한 예쁜 미소다.

남의 집에 초대받아 가면서 아무 것도 들고 가지 않은 게 영 어색해 “딸에게 통닭이나 한 마리 튀겨주세요”라며 500루피(약 1만원)를 내미는데, 프랭키 엄마는 이를 몇 차례나 마다했다. 억지로 손에 쥐어주며 “착한 아드님과 건강하게 사세요”란 작별인사를 전했다. 프랭키의 할머니와 엄마, 여동생은 대문 밖까지 따라 나와 기자가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었다.

 

▲ 푸른 나무와 조화를 이루는 함피의 고대 유적.
▲ 푸른 나무와 조화를 이루는 함피의 고대 유적.

숙소로 돌아오는 길. 프랭키의 친구가 한다는 이발소에 들렀다. 한국을 떠나올 때 이미 덥수룩하게 자라있던 머리칼을 정리하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이발사가 손에 든 가위가 한국 초등학생들이 색종이나 마분지를 자를 때 쓰던 것과 꼭 같다. 이건 또 무슨 코미디 같은 상황인가.

하지만, 걱정도 잠시뿐. 그 조악한 가위를 사용해 쓱싹쓱싹 잘도 머리칼을 헤집어가며 잘라낸다. 솜씨가 놀랍다. 이래서 `인크레더블 인디아(Incredible India)`인가?

거기다 이발이 끝난 후 서비스로 해주는 안마가 시원스럽기 그지없다. “우두둑” 뼈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소리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원해졌다. 게다가 이발 비용도 저렴하다. 겨우 1천원.

상쾌한 기분으로 호텔로 돌아와 프랭키를 돌려보냈다. 종일 이것저것 귀찮게 요구하는 기자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음에도 마지막까지 웃는 얼굴로 “편히 쉬어요”라는 인사를 잊지 않는 그가 더 좋아졌다.

160cm가 채 되지 않는 조그만 키에 어깨가 여자애처럼 좁은 프랭키가 타박타박 기자를 등지고 걸어갔다.

그의 등이 183cm에 90kg인 기자의 등보다 더 넓어 보였다. 환시(幻視)였다. 그날, 프랭키가 선물한 환시는 자신을 희생하며 가족을 위해 힘겨운 발버둥을 치고 있는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이었다.

 

▲ 우티와 쿤누르를 오가는 기차에서 만난 인도 신혼부부.
▲ 우티와 쿤누르를 오가는 기차에서 만난 인도 신혼부부.

세상 가장 아름다운 열아홉 인도 신부

사는 내내 가끔은 기억 속에서 꺼내 볼 아름다운 추억이 된 인도여행.

내륙에 위치한 도시 함피가 너무 더웠기에 지친 몸과 마음을 시원하게 식히려 영국인들이 만든 휴양도시 우티로 급하게 몸을 숨겼다.

위도는 비슷함에도 온도 차이는 무려 30도가 났다. 함피가 섭씨 40도라면 우티의 새벽은 영상 10도. 한기가 느껴져 벽난로를 피워야 할 정도였다.

우티가 선물한 시원함과 쾌적함에 다시 힘을 얻어 산세가 아름답기로 소문난 인근마을 쿤누르(coonoor)로 소풍을 갔다. 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려가, 오토 릭샤를 대절해 일대를 돌아보고, 해질 무렵 장난감 같은 협궤열차를 타고 돌아오는 당일치기 투어였다. 현지에서 친해진 릭샤왈라들과 의기투합해 10병이 넘는 맥주를 마시고 우티로 돌아오는 길. “칙칙폭폭” 절경 속을 달리는 협궤열차에서 신혼여행을 왔다는 인도인 부부를 만났다. 남편은 26살, 아내는 19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착하게 웃는 둘의 얼굴이 더없이 행복해보였다. 말 그대로 파안대소(破顔大笑).

기자의 맞은편 자리에 앉은 남편은 낡은 필름카메라를 가지고 있었는데, 아내 사진은 한 장도 안 찍어주고, 내내 바깥 풍경만 찍어대기에 점잖게 한마디 충고했다.

“어이, 와이프 사진도 좀 찍어주고 그래야지.”

그런데 돌아온 대답이 걸작이다.

“이게 24장밖에 안 찍히거든요. 그래서 저 사람 찍어줄 여분이 없어요.”

한국에서 결혼해 살고 있는 친구와 후배의 경우라면 아내에게 맞아 죽기 딱 좋을 소리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도 열아홉 어린 아내는 수줍게 웃기만 했다. 부러웠다. 저렇듯 착한 와이프를 얻었으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달리다보니 숨어 있던 장난기가 발동했다. 기자의 디지털카메라에 관심을 보이는 남편에게 전격적으로 제의했다.

“이봐 새 신랑, 아내 볼에 키스해 봐. 그러면 이 카메라 선물로 줄게.”

절대로 할 수 없단다. “인도인은 한국인과 달라요”는 말을 여러 번 반복하며. 한 발 물러섰다. “그럼 손등에라도 해봐.”

가만히 웃고만 있던 신부도 손사래를 치며 부끄러워한다.

“남편이 원한다고 해도 난 절대로 그럴 수 없어요.”

“해봐라”와 “안 된다”를 거듭하며 우리는 오래 알아온 친구들처럼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그 사이 기차는 어느덧 우티역(驛)에 도착했다.

“앞으로도 건강하고 착하게 살아야한다”는 진심 어린 축복의 말을 전하며 그 신혼부부와 헤어졌다.

물질적 풍요 없이도 서로의 눈동자를 마주보며 마냥 행복해하던 신랑과 신부.

그들은 오늘도 선량하고 아름답게 살아가고 있겠지?

꼭 그럴 것이라 믿고 싶다.

사진제공/송선호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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