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길 위에서
인도 ⑨

▲ 수천 년을 흘러온 강에서 낡은 배를 타고 물고기를 잡는 인도 사람들.
▲ 수천 년을 흘러온 강에서 낡은 배를 타고 물고기를 잡는 인도 사람들.

인생은 짧고, 하루는 더 짧다. 이 `짧음`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인간의 생은 위대해질 수도, 비루해질 수도 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다. 결코 길지 않은 `인생`과 `하루`를 즐겁게 살 수 있는 권리를 우리는 누리고 있는가?

말리기호텔에서 한 번 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한참 어린 독일 여성 프란시와 만나 저녁을 먹을 것이니, 최소한의 격식은 차려야 했다. 그건 인간으로서의 매너이기도 하다.

오토릭샤 가이드 프랭키와의 서운하고 안타까운 이별
폐허의 장엄함·멋진 풍광에 취한 인도의 시간들

프랭키가 오늘도 고생이 많다. 호스펫에서 함피로, 함피에서 호스펫으로, 다시 같은 길을 되짚어 프란시의 숙소까지 기자를 데려다줘야 했으니. 그의 수고를 생각해 은근슬쩍 100루피의 팁을 주머니에 찔러주었다.

저녁식사를 위해 어두워진 길을 되짚어 함피로 향했다. 저물녘의 안도감은 그날도 변함이 없었다. 달리는 길 건너편에선 결혼식이 열리는지 울긋불긋 화려한 의상을 챙겨 입은 축하객들이 어둠을 밝히는 환한 얼굴로 신부의 집을 향한다.

 

▲ 도심에 자리한 함피의 고대 사원.
▲ 도심에 자리한 함피의 고대 사원.

프란시가 알려준 게스트하우스 앞에 프랭키의 오토릭샤가 멈췄다. 조그만 숙소의 2층 난간에서 프란시가 고개를 내밀어 인사하며 “어서 올라오라”고 한다.

프랭키에게 “넌 이제 그만 엄마 집으로 돌아가라”고 작별인사를 했다. 그런데, 이 녀석이 뭘 안다고 골목길을 나설 때 “굿 나잇!” 하며 눈을 찡긋한다.

프란시가 묵고 있는 숙소의 계단을 올랐다. 얼핏 보기에도 허름한 숙소다. 프란시는 화장기 없는 발그레한 얼굴과 물기 묻은 머리칼로 기자를 반겼다. 게르만 여성의 건강함이 보기 좋았다.

옆방에 묵고 있다는 이스라엘 청년 하나가 숙소를 나서는 프란시를 향해 “어디 가니?”라고 쓸데없는 참견을 한다. 프란시가 `쿨`하게 응대했다. “나? 데이트 하러 가.”

 

▲ 인도의 꽃가게. 주인의 잔잔한 미소가 보기 좋았다.
▲ 인도의 꽃가게. 주인의 잔잔한 미소가 보기 좋았다.

어두워진 함피의 골목길을 걸었다. 프란시가 봐놓은 루프탑 레스토랑(옥상에 꾸며진 식당)이 있다고 했다. 굽이굽이 길을 돌아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프란시는 마늘빵과 과일샐러드를 먹겠단다. 기자도 같은 걸 주문했다.

그런데, 나온 음식이 너무 싸구려처럼 보이고 볼품이 없다. 접시는 가장자리가 깨져있고. 하기야 120루피(2400원)짜리 저녁밥이 오죽하겠나. 좋은 요리를 사주지 못하는 미안함을 맥주 여러 병을 주문하는 것으로 상쇄했다.

주거니 받거니 마신 7~8병의 맥주가 인종과 살아온 환경이 전혀 다른 둘의 사이를 가깝게 만들어줬다. 마침내 취기가 오른 프란시는 푸른 보석이 박힌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당신, 시 쓴다면서요. 나한테 저 하늘의 별을 노래해주세요”라는 곤혹스러운 부탁까지 했고.

창졸간에 맞이한 인도에서의 데이트는 재론의 여지없이 즐거웠다. 음식이 담긴 접시와 술병을 모두 비우고 숙소까지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바래다준 게 고마웠던지 프란시가 기자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게 유럽식 인사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분이 좋은 건 어쩔 수 없었다.

함피를 떠나야하는 날이 왔다. 풍광이 취기를 부르는 묘한 경험을 했던 며칠. `몽롱한 상태`가 아님에도 폐허를 통해 확인한 장엄함. 술기운보다 강렬한 `그 무엇`이 기자를 이 도시로 다시 돌아오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 폐허 위에 남아있는 고대의 유적이 매력적인 도시 함피.
▲ 폐허 위에 남아있는 고대의 유적이 매력적인 도시 함피.

급속도로 팽창하는 자본의 맹렬한 기세도, 세련됐지만 인간본연의 모습에선 멀어질 수밖에 없게 만드는 문명의 그물도 여기만은 피해갔으면 하는 바람. 그건 과한 욕심이었을지도 모른다. 허나, 분명 그때 심정은 그랬다.

프랭키와의 이별은 서운하고도 안타까웠다. 엄마와 할머니, 여동생을 먹여 살리며 일찍 철든 열여덟 소년. 그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를 덜어내 줄 수 없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왔다. 함피를 출발해 뱅갈로르(Bengaluru)로 가는 버스는 해가 저문 후에 있었기에 그와 저녁을 먹기로 했다.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끝내고 내려오니 로비에 프랭키가 기다리고 있다. “뭘 먹고 싶으냐”고 물으니 “아무거나 좋아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하긴, 프랭키는 기자와 함께 다닌 사흘 내내 자기 의견이나 주장을 내세운 적이 없었다.

뱅갈로르행(行) 버스표도 프랭키가 예매해준 것이었다. 자기가 차의 정확한 출발시간과 발차 장소를 알고 있으니, 걱정 말고 편하게 밥 먹고 술도 한잔 마시란다. 술 좋아하는 기자의 라이프스타일까지 알아서 챙겨주는 기특함이라니.

프랭키의 오토릭샤는 몇 분 만에 인근 호텔 야외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가다가 우연히 만난 프랭키의 친구 한 명도 합석했다. 오늘 헤어지면 이 소년가장을 언제 또 볼 수 있을까. 이것저것 맛있는 걸 좀 많이 사주고 싶은데, 프랭키와 친구 둘 모두 겨우 감자튀김과 시원찮은 빵 쪼가리만을 먹겠단다.

 

▲ 섬세함과 미려함이 돋보이는 인도의 고대 건축물.
▲ 섬세함과 미려함이 돋보이는 인도의 고대 건축물.

맡겨두면 안 되겠다싶어 기자가 메뉴판을 뺏어들고 마구잡이로 3~4개쯤의 요리를 주문했다. 당연지사 맥주와 위스키도 가져오라고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기자는 인도요리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고, 뭘 모를 땐 비싼 걸 시키면 그 값어치만큼 맛있을 것이라는 어림짐작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 `어림짐작`은 크게 틀리지 않아 한 개의 요리를 제외하고는 다 먹을 만했다. 프랭키와 친구도 자기네들 접시에 덜어주는 음식을 넙죽넙죽 잘 먹는다. 속으로 웃으며 혼잣말을 했다.

“이렇게 맛있게 먹을 거면서 왜 얌전을 빼고 그래.”

기자는 위스키를, 그들은 맥주를 마시며 닭고기와 양고기, 이름을 알 수 없는 민물생선으로 만든 요리를 즐겼다. 해가 진 호스펫 거리는 행인들로 북적거렸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번잡함과 소음도 익숙해져서인지 싫지 않았다.

이윽고 식사가 끝나고 뱅갈로르로 향하는 차에 올랐다. 버스터미널까지 따라 나온 프랭키가 오래오래 손을 흔들어주었다. 돌아보니 그 표정이 슬퍼보였다. 그와의 작별이 피붙이와의 헤어짐인 듯 기자의 가슴도 저려왔다.

▲ 베나울림 해변 식당에서 `더치페이` 문제로 함께 웃었던 인도계 프랑스인 살리나.<br /><br />
▲ 베나울림 해변 식당에서 `더치페이` 문제로 함께 웃었던 인도계 프랑스인 살리나.
인도에서 경험한 `더치페이`

인도 서남부 베나울림 해변. 바다 위로 떨어지는 석양이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흔드는 곳. 오두막 형태로 만든 숙소에는 기자 외에도 이탈리아 할머니, 스물다섯 살 프랑스 여자 카일라, 인도에서 태어났지만 생의 80% 이상을 유럽에서 보낸 인도계 프랑스인 살리나가 묵고 있었다.

모두 제각각 혼자 여행 중인 4명의 이방인들이 외로움을 핑계로 맥주 한잔을 나누며 친해졌다. 국적과 인종에 관계없이 웃는 얼굴로 서로를 대했지만, 살아온 환경이 다른 만큼 생활에서의 에티켓은 판이했다. 특히 `더치페이`(각자 내기) 문제.

다음 일정이 모두 다른 넷이 버스표를 예매하기 위해 시내로 걸어나갔다. 5월의 남인도는 거리에 내놓은 계란이 익어버릴 정도로 덥다. 그래서 숙소로 돌아올 땐 택시를 탔다. 한국 돈으로 대략 1천500원 정도의 요금이 나왔다.

큰돈이 아니기에 동승한 여자들에게 택시비를 나눠 내자고 말하기는 싫었다. 해서 흔쾌히 운전사에게 돈을 지불했다. 그런데, 이건 뭔가. 택시에서 내린 여자 셋이 저마다 지갑을 꺼내더니 5루피(약 100원)짜리 동전까지 꼼꼼히 계산해 내민다.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함께 탄 택시비 정도는 혼자 내는 게 한국 사내들의 매너고, 숙녀들을 위한 배려”라고 설득하느라 애를 먹었다. 살리나는 한참을 “나눠서 내야하는데, 나도 돈 있는데...”라고 중얼거렸고.

 

▲ 조용하고 평화로운 인도의 시골마을. 이곳에선 누구나 착하게 살고 싶어지지 않을까.
▲ 조용하고 평화로운 인도의 시골마을. 이곳에선 누구나 착하게 살고 싶어지지 않을까.

유사한 사건(?)은 또 있었다. 네 사람이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갔을 때다. 채식주의자인 카일라는 샐러드와 맥주를, 이탈리아 할머니는 통밀빵과 오렌지주스를, 살리나는 닭고기볶음밥을, 기자는 새우구이에 인도산 럼(Rum)을 마셨다.

식사가 끝나고 계산을 할 때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들 몰래 기자가 음식 값을 지불해버린 게 빌미였다. 넷이 먹은 걸 모두 합해도 1만원이 조금 넘었을 뿐인데, “받아라” “안 받겠다”는 이야기가 수차례 반복됐다. 결국엔 모두의 웃음으로 마무리된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와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니 “잘했다. 사나이가 옹졸하게 그걸 받으면 안 되지”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었고, “각자 나눠 내는 게 그들의 문화인데 존중해주지 그랬냐”라며 타박하는 이들도 있었다.

혼자 떠나는 여행이 매력적인 건 지금껏 모르고 살아왔던 사람들을 만나 이렇듯 판이한 문화를 경험해 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어쨌건 기자는 인도에서 `더치페이`의 곤혹스러움과 즐거움을 제대로 배웠다.

사진제공/송선호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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