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병철<br /><br />시인
▲ 이병철 시인

친구와 함께 예비군 훈련을 가기로 했는데 훈련 당일에 친구가 오지 않았다. 나는 사실 그날 훈련받기가 좀 부담스러웠지만 친구를 배려하느라 하는 수없이 그러기로 했던 터다. 혼자 훈련받고 혼자 밥 먹었다. 짜증과 분노가 밀려왔다.

철없던 범죄의 기억을 고백하자면, 중학교 3학년 때 외삼촌 오토바이를 몰래 끌고 나와 친구들과 타고 논 적 있다. 무면허였다. 관악산 관음사까지 이어진 포장도로를 신나게 달리는데 배드민턴 치고 하산하던 주민이 경찰에 신고한 모양이다. 덤불에 숨었다. 조금만 버티면 경찰이 철수할 것 같은데, 초입에 어설프게 숨었던 한 놈이 발각됐다. “너는 훈방 조치한다”는 회유에 넘어간 그놈이 우리의 은신처를 줄줄이 불었다. 그때 정말 이가 바득바득 갈렸다.

뜻을 모아 행동을 같이 하기로 했는데 중요한 순간에 이탈해 연대를 와해시키는 사람들이 있다. “하자! 하자!” 앞장서서 외치다가 진짜 하면 슬그머니 빠져나간다. 그런 걸 `뒤통수 친다`고 표현한다. 최전방에 동반 입대한 두 친구가 있는데, 동고동락하자 해놓고 한 녀석이 군에 연줄 있던 아버지를 통해 `꿀보직`으로 도망갔다. 전방에 혼자 남은 친구는 나중에 유격훈련 조교가 돼서 배신자를 `빡세게` 응징했다.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자주 나오는 안줏거리다.

숱하게 들은 뒤통수 이야기가 있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회군`이다. 학생 시위를 주도하던 서울대 총학생회 지도부 내에서 온건파 심재철과 강경파 유시민의 입장이 엇갈렸다. 수십만 대학생들은 원래 청와대까지 행진하기로 했으나 총학생회장 심재철의 난센스로 인해 서울역에서 해산하고 만다. 유시민을 비롯한 수많은 학생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내려진 심재철의 결정에 의해 결국 그 많은 인파는 뿔뿔이 흩어졌다. 한 데 운집한 엄청난 시위대에 쩔쩔매던 전두환 신군부는 알아서 사분오열된 대학생들을 손쉽게 제압했다. 휴교령과 계엄령이 확대되고, 사흘 뒤 광주의 비극이 시작됐다.

2002년 대선 전날 밤 단일화 약속을 깨고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던 정몽준도 있다. 대북관의 차이가 막판까지도 좁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밝혔지만, 실은 노무현이 공동 유세현장에서 자신 대신 정동영과 추미애를 차기 리더십으로 추켜세운 것에 심기가 상했다. `소주 러브샷` 연대가 무너져 사면초가에 몰린 노무현이 정몽준 집 앞에서 문전박대 당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연대의 가치, 공동체의 비전보다 개인의 손해나 이득이 더 크게 보이는 순간 개인은 언제든 이탈할 수 있다. 언제든 뒤통수 칠 수 있다. 손해나 이득은 금전적인 것, 정치적인 것에서 다양하게 발생하는데 집단 속 일부 개인은 그것들을 주시하며 열심히 계산기 두드린다. 때로는 영웅심리나 지나친 이데올로기 경도가 연대 이탈의 동기가 되기도 한다.

광화문 집회에 참가했던 네 명의 시민단체 회원이 북악산 넘어 군부대를 지나 청와대로 진입하려다가 검거된 해프닝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철없는 짓을 영웅적 행위로 착각해 실시간으로 SNS에 중계하고, 파출소에서 독립투사마냥 당당했다. 무슨 김신조 일당인가. 어처구니가 없다. 영웅이 되고 싶은 개인의 한심한 욕망이 촛불을 퇴색시킨다. 연대의 목적을 망각하고 제멋대로 날뛰다 공동체 전체에 피해를 입힌다. 이런 것도 뒤통수 치는 행위다.

인파가 늘어나고, 한목소리로 같은 소망을 외칠수록 연대를 와해하려는 자들의 회유와 왜곡, 날조, 폭력 조장 등 방해 공작도 거세질 것이다. `우리`가 아니라 `나`로 광장에 설 때 취약하다. 집회가 거듭될수록 `개인`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꾸 생겨날 것이다. 그들에 의해 연대에 균열이 생겨선 안된다. 화합의 광장이 혹시라도 분열의 자리가 될까봐 노파심이 든다. 물론 작은 잡음은 큰 함성에 묻히겠지만 비폭력 시위, 자발적 환경 미화, 의경 보호, 준법 철저 같은 미덕이야말로 촛불 연대를 결속하는 힘이다.

지금까지 그랬듯 앞으로도 계속 유지돼야 한다. 뒤통수 조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