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길 위에서
인도 ⑪

▲ 인도 사람들은 화려한 원색을 좋아한다.

익숙하지 않은 공간을 떠도는 여행은 `익숙한 것들`에 대한 그리움을 부른다. 특히 음식이 그렇다. 입에 맞지 않는 걸 먹어야한다는 건 비극이다. 여행자는 이런 비극을 감수하면서까지 `새로운 것들`을 찾아가는 사람이다.

인도에서 만나는 한국음식, 포장용 같은 냉면과 `튀김` 삼겹살
머나먼 이국서 경험한 익숙한 맛에 소주까지… 최상의 맛 느껴

 

▲ 인도인들이 즐겨 먹는 탈리. 접시 위에 밥과 반찬이 함께 놓여있다.
▲ 인도인들이 즐겨 먹는 탈리. 접시 위에 밥과 반찬이 함께 놓여있다.

네댓 명의 사람들에게 묻고 또 물어 `코리안 레스토랑`을 찾긴 찾았다. 오후 2시를 조금 넘긴 어중간한 시간이라 그런지 손님이 거의 없다. 주인이라는 한국 여자는 아주 잠깐 얼굴이 보이더니 어디론가 가버렸고, 인도인 종업원들에게 냉면과 삼겹살 구이를 주문했다. 한국에서 수입된 팩소주도 있단다. 익숙한 그것들이 반가웠다.

“자꾸 부르면 귀찮을 테니 소주는 아예 3팩쯤 가져다주세요.”

주방과 홀이 분주하게 움직이더니 이윽고 테이블에 음식이 차려졌다. 음...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냉면은 한국 슈퍼마켓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포장제품을 이용해 만든 것 같고, 삼겹살은 철판 위에서 너무 오래 구워 `구이`가 아니라 `튀김` 수준이다. 포항이나 서울에서라면 이런 상차림이 반가울 리 없다. 허나, 그때는 상황이 달랐다. 조금 과장하자면 냄새만 맡았을 뿐인데, 그 익숙한 향기에 뱃속이 요동을 쳤다. 게다가 인도인 종업원 서너 명이 먹는 내내 웃으며 기자를 쳐다보고 있는데 어떻게 인상을 찡그리겠나.

 

▲ 인도 번화가의 모습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시골로 가면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풍광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 인도 번화가의 모습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시골로 가면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풍광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비록 튜브에 든 겨자지만 듬뿍 치고, 면발에 식초도 뿌려 단번에 삼키듯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시원함, 그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인도에선 잘 사용하지 않는 젓가락을 이용해 소주 안주로 먹는 삼겹살 `튀김`도 그런대로 고소하다. 맞다, 절에 가서 등심구이를 찾는 건 우스운 일이다. 인도에서 이 정도의 한국음식이라면 `A급`이라 불러도 좋으리라.

인도인들이 즐겨먹는 탈리(thali·인도식 백반)보다 20배는 비싼 `한국식 점심`을 혼자서 먹었다. 기분 좋게 값을 치르고, 웃음으로 반겨준 종업원들에게 약간의 팁도 나눠준 후 배를 두드리며 나왔다.

식사 후엔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와 낮잠을 청했다. 낮술로 마신 소주가 과했던 것인지, 냉면과 삼겹살을 너무 먹은 포만감 탓인지 일어나니 이미 방 안이 캄캄했다. 오랜만에 맞이하는 `도시에서의 밤`을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 도시의 풍경은 어느 곳이나 비슷하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인도 길가에도 광고 현수막이 많이 걸려 있다.
▲ 도시의 풍경은 어느 곳이나 비슷하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인도 길가에도 광고 현수막이 많이 걸려 있다.

어둠이 내린 뱅갈로르는 여타의 한국 도시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네온사인은 고사하고 환한 형광등조차 흔하지 않은 인도의 시골마을에서 일주일 정도를 머문 탓인지 번쩍이는 밤의 불빛들이 더없이 반가웠다.

달려오는 오토릭샤를 잡아타고 “물 좋은 나이트클럽으로 갑시다”라고 하니, “오케이! 노 프라블럼”이란다. 인도 사람들은 잘 모르거나 불가능한 부탁을 받아도 “몰라요” “안 돼요”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릭샤왈라(오토릭샤 운전수)가 내려준 곳이 예상외로 너무 조용하다. 쿵쾅거리는 음악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물론, 입구를 드나드는 청춘남녀도 없다. 썰렁~ 그 자체다. 허나, 내친걸음이니 어쩔 것인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 “여기가 나이트클럽 맞냐”고 물었다. 그런데...

 

▲ 인도 지방도시의 한낮 풍경.
▲ 인도 지방도시의 한낮 풍경.

거긴 회원제로 운영되는 인도 부자들을 위한 고급 사교클럽이었다. 릭샤왈라는 “클럽”이라는 단어만 알아듣고는 여기로 데려다준 것이다.

대략의 자초지종을 듣고는 기자의 초라한 행색을 아래위로 훑어보던 건장한 경비원 2명이 콧수염을 들썩이며 웃었다. 어쩌랴. 기자도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 고급 사교클럽 앞에서 다시 오토릭샤를 기다렸다. 인도에 머무는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독일과 스웨덴에서 생산된 고급 승용차들이 건물 옆 주차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맞다. 한국이나 인도나 아니, 세상 어느 곳이나 부자들은 있기 마련이고, 그들은 `그들만의 리그` 속에서 나오지 않으려고 한다. 가난을 눈앞에서 본다는 건 불편한 일이니까. 가진 자들이 보기에 못가진 자들이란 `게으름뱅이`에 불과할 테고, 그런 이들과 어울린다는 것 자체가 격에 맞지 않다고 믿으며 살 테니까.

 

▲ 인도 중부지역 강을 오가는 하우스보트.
▲ 인도 중부지역 강을 오가는 하우스보트.

고상한 디자인으로 꾸며진 사교클럽 건물 앞에서 복잡한 심사 속으로 빠져들었다. 나이트클럽이고, 록카페고 만사가 다 귀찮아졌다. 인도까지 와서 그런 걸 찾고 있는 스스로가 우스워 보이기도 했고.

에라, 모르겠다. 어디 가서 올드 몽크(Old Monk·인도산 럼)에 맥주 섞어 폭탄주나 마시자. 단순한 술집이라면 머물고 있는 제국호텔 근처에도 많았다.

왔던 길을 되짚어 눈에 띄는 아무 술집에나 들어갔다. 한국 생맥주집이랑 유사한 분위기다. 미국 가수의 올드팝이 흘러나오고, 조명은 어둡다. 그러면 어때. 남자 혼자 마시는데 분위기가 무슨 대수인가. 올드 몽크 한 병과 맥주 3병을 주문해 급하게 폭탄(?)을 제조했다.

빨라서 좋은 건 비행기밖에 없는 모양이다. 홀로 급히 마신 폭탄주 대여섯 잔에 단숨에 취기가 올랐고, 발끝에서부터 시작된 나른한 느낌이 척추를 타고 뒷머리 쪽으로 빠르게 번져갔다. 술 마시는 스타일이 독특해 보였는지 매니저가 테이블로 와서 “무슨 슬픈 일이 있느냐”고 묻는다. “아니. 한국 남자들은 기쁠 때도 이렇게 마셔”라고 응수했다. 술집 매니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참 주고받았다. 외로워서였을 것이다.

사회학자나 평화운동가도 아니면서 카스트제도의 불합리성과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의 비인간성, 종교와 인종이 야기한 내전(內戰) 등등. 다음날 일어나면 기억하지도 못 할 거창한 이야기들을 시원찮은 영어실력으로 쉼 없이 떠들었다. 휘적휘적 손발을 내저으며 술집을 나온 게 몇 시였는지도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그저 깨어난 아침, 머리가 강철 해머로 두드려 맞은 듯 아팠다는 것만 뚜렷이 떠오른다. 주독(酒毒)이야 시간 외에는 약이 없는 병. 숙취의 고통은 한국에서나 인도에서나 똑같았다.

 

▲ 조용한 웃음과 달관의 태도로 기자를 놀라게 한 인도 노인.
▲ 조용한 웃음과 달관의 태도로 기자를 놀라게 한 인도 노인.

`인도 사람`을 읽는 3가지 키워드

틀에 맞춰진 한국인의 시각과 관념으로 볼 때 인도인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들의 행위는 때로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합리적이지 못하고, 예의에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게다가 종교·문화적 특성 때문에 쓴웃음을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적지 않다.

여행이란 `사람`을 만나는 일과 다름없다.

아래 인도인들의 3가지 행동특성을 미리 알고 간다면 인도여행에서 겪어야 할 당혹스러움이 조금은 완화될 수도 있을 듯하다.

▲ 시시때때로 떠올리는 미소

즐거울 때는 물론이거니와 어색할 때도,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면서도 인도 사람들은 웃는다.

그 웃음에는 묘한 힘이 깃들어 있다.

세상과 자신을 지척에 있는 존재가 아닌 멀고 먼 별개의 존재로 보는 시각. 이는 한국인과 인도인을 구별하는 잣대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만원버스에서 발등을 밟혀도, 상대방이 다소간 실례되는 행동을 해도 웃음으로 넘길 수 있는 너그러움이 인도 사람들에겐 있다.

웃을 수 있다는 건 여유를 가졌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다. 경제적으론 훨씬 더 부유한 한국인들에겐 왜 이 `여유`가 사라졌을까?

▲ 삶에 대한 낙관

인도의 조그만 산골마을에서 만난 칠순 노인에게 물었다. 그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노점상.

그럼에도 눈동자에 무언가 범접할 수 없는 기품을 담고 있었다.

“할아버지, 이렇게 사는 게 힘들지 않으세요?” 돌아온 간명한 대답이 어지간한 철학자 못지않았다.

“왜 힘들지 않겠어. 하지만, 부자라고 고통과 고민이 없겠어? 이게 신(神)이 내게 허락한 삶이라면 싫어도 받아들여야지 어쩌겠어.”

인도인들은 큰 욕심이나 이룰 수 없는 욕망을 의도적으로 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게 그들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이유가 아닐지.

▲ `카스트제도`에의 순응

`인도의 경제수도`라고 불리는 뭄바이에서 택시운전을 하는 브라만(Brahman·카스트제도의 최상위 계급)은 때 묻은 셔츠나 바지를 제 손으로 빨지 않는다고 했다. 당장 쌀을 살 돈이 없어 굶더라도 세탁물은 수드라(Sudra·카스트제도의 최하위계급)에게 맡긴다는 말도 덧붙였다.

세탁소를 운영해 아무리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해도 수드라는 브라만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수천 년 이어져온 카스트제도의 엄혹함은 여전히 인도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다.

한국인의 시각으로 볼 때는 불합리하더라도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인도의 현실이다.

사진제공/송선호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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