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의수 전 포스텍 교수·경제학

필자는 대학을 마치고 3년의 사회생활 후 1974년에 미국으로 떠나면서 미국의 개인주의 사회보다 동양의 공동주의 사회가 더 낫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개인주의는 `개인의 자유대로 생활하니 무질서하고 무책임하지 않겠나`고 생각했었고 공동주의는 `공동의 이익을 구하니 질서와 책임감이 지배하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미국에서 살아보니 무질서 가운데 질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됐고, 개인의 책임이 동양문화에서 보다 더 강하게 지켜짐을 발견하게 됐다.

`왜 그럴까?` 생각하다보니 문득 `그럴 수 밖에 없구나` 무릎을 쳤다.

나의 개인주의를 지키려면, 남의 개인주의도 존중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진정한 개인주의는 서로의 개인을 존중해주는 사회를 형성하게 된다는 역설적인 결과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작은 예로, 미국에서 부모가 어린아이를 동반하고 식당에 오면 아이들이 떠들석하거나 의자 위와 아래를 오르락 내리락 하거나 여기저기 주위를 돌아다니지도 않는다.

자유방임의 교육사회에서도 식당에서 부모의 단속은 엄한 것이다.

네 명의 아이들을 키웠기 때문에 부모 심정을 이해하는데 그런 장소에서 아이들을 풀어주고 부모들은 모처럼 해방감을 즐기고 싶지 않겠는가?

입장을 바꿔 보자.

모처럼 연인과 근사한 식사를 하러 레스토랑을 찾았는데 옆 테이블 아이들이 떠들썩하거나 식당 여기저기를 정신없이 돌아다닌다면 자연스레 얼굴이 찌푸려질 것이고 밥맛도 떨어지며 더이상 아이들이 귀엽게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남의 개인 권리를 존중하는 개인주의 사회`는 이처럼 남의 권리를 존중함에 그치지 않고, 공공장소의 질서를 지키고 공공장소를 너도 나도 즐기게 만들어 사회적 행복감과 가치를 고조시켜 준다.

각 개인들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유경쟁시장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수요공급의 균형을 이루고 공정시장 가격이 형성된다. 시장 또는 사회의 복지와 개인들의 이익이 함께 최적화된다는 경제학의 대부라고 불리는 `아담 스미스`의 경제학시장이론이 사회적으로도 적용된다고 하겠다.

30여 년 미국 생활 후에 2010년 한국에 돌아와 경제학과 재무학을 가르쳐 보니 오랜 미국 생활로 잊고 살았던 한국 사회만 사용되는 독특한 단어를 여럿 듣게 됐다.

이른바 `갑을관계`, `상명하복`, `위계질서` 등의 표현인데 이는 TV사극을 통해 더욱 명확히 깨닫게 됐다.

사극의 주요인물은 왕과 주변 사람들인데, 드라마의 과장이 섞여 있을지 모르나 왕은 절대 권력을 지니고 있으며 신하는 물론 고관들도 왕 앞에서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말을 잘못했다가 그 자리에서 목이 달아나기도 하니 인간이 사는 세상이 과연 이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극마다 보여지는 모습은 비슷했고 상명하복 등 공동사회의 병폐는 왕실 곳곳에 뿌리깊게 박혀 있었다.

이처럼 공동사회는 왕과 신하 사이에서만 아니라 양반과 노비, 심지어는 같은 계층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희생을 강요하고 있었다.

진실은 권력에 의해 결정되고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을 주장하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사회였던 것이다.

그러한 인간관계가 반복되는 장면에 계속 노출되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물들어 당연한 것으로 생각이 변하거나 무감각해질 것 같아 사극을 더이상 안보기로 했다.

공동사회라는 명목 하에 개개인이 존중되는 대신, 소수의 `갑`이 다수 `을`의 권리를 짓밟는 사회는 어느 저명한 교수의 말처럼 `개인 없는 개인 이기주의 사회`로 자연히 변하기 마련이다.

공동사회의 이 역설적인 결과는 우리를 슬프게 만든다. 우리 사회가 개인 없는 개인 이기주의 사회라면 이는 보통 큰 일이 아니다. 이 교수로부터 이러한 표현을 처음 들은 이후, 한시도 걱정을 놓을 수 없었다. 우리 사회가 개인 없는 개인 이기주의 사회라니…. 내가 태어나고, 자라고, 공부하며 성장한 고향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