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대선이 코앞이라 요즘 화제는 단연 후보자 토론이다. 토론을 잘 하고 못한 사람들이 자주 입길에 오른다. 한국의 대중이 보기에 이번 대선 후보자들은 자질이 다소 부족한 모양이다. 토론에 만족한 사람들보다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어떤 이들은 오불관언(吾不關焉)의 자세를 취하기도 한다. 토론이 대선결과를 좌지우지할 수 없다는 판단이다.

대선후보들이 토론에 익숙하지 않은 까닭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토론은 민주시민의 첫 번째 자질로 꼽힌다. 내가 가진 생각과 주장을 설득력 있게 전개해 상대방을 수긍(首肯)하도록 인도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주장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주장을 온전하게 전달하는 능력도 그 못지않게 종요롭다. 거기 필요한 자질은 논리 정연함과 수사학, 그리고 침착함이다. 중세대학의 교양과목에 문법, 수사, 변증이 포함된 데에는 근거가 있는 셈이다.

자신의 주장과 사유를 조리(條理)있게 전달하는 것만큼 필요한 행위는 상대방의 주장이나 생각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토론은 일방적인 주장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토론에는 상대가 전제된다. 일방통행식의 주장이나 생각의 나열은 토론이 아니다. 나와 다른 주장과 생각을 펼치는 상대방의 입장을 경청(傾聽)해야 올바른 대응과 역습의 기회가 찾아온다. 이런 점에서 대선 후보자들이 적잖은 아쉬움을 던져주는 모양이다.

토론능력은 정치가라면 누구나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정치의 요체(要諦)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고유한 화법과 수사와 논리를 확보하지 않은 사람은 유능한 정치가가 아니다. 유럽의 정치 지망생들은 어린 시절부터 토론능력을 훈련받는다. 10대 시절부터 정당에 가입해 청년부 활동을 전개한다. 거기서 능력을 인정받으면 지방의회나 연방의회 혹은 유럽연합의회에 진출한다. 그것이 정치가가 되는 기본적인 방향이다.

한국에서도 국회나 지자체 혹은 국감장에서 토론능력은 돋보이는 자질일 수밖에 없다. 하나의 사안(事案)을 두고 조목조목 따지고 요모조모 살피는 것이야말로 국정을 이끌어가는 데 꼭 소용되는 덕목이다. 문제는 우리의 교육제도와 정당정치가 토론문화에 익숙하지도, 그런 방향으로 젊은이들을 인도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토론의 첫걸음은 독서와 사색이다. 풍부한 지식과 정보를 가진 사람은 당연히 토론에서 우위(優位)에 설 수밖에 없다.

정보와 지식이 많다는 것은 사유하는 방식의 다채로움과 다각도를 보장한다. 천편일률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라 자신만의 고유한 생각과 언어를 선보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교육은 초중등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불철주야(不撤晝夜) 외우는 것에 집중한다. 암기한다는 것은 문제의식이나 물음표의 상실에서 출발한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다짜고짜 머릿속에 쑤셔 박는 것이다. 그것이 성적을 올리고 교사들에게 예쁨을 받는 길이기 때문이다.

남다른 생각이나 행동은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금기(禁忌)다. 남들 하는 대로 묻어가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손가락질과 왕따를 각오하지 않은 담에야 도발적이고 창의적이며 이색적인 생각이나 미래기획은 아예 불가능하다. 이런 판국에 토론은 쓸모 있는 자질과 능력에 속하지 않는다. 그럴 시간이 있다면 공무원시험이나 공기업시험을 준비하는 편이 훨씬 낫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럴진대 후보자들에게 토론능력은 언감생심이다.

우리는 21세기 첨단의 시대를 살아간다. 세계 정치 지도자들의 언행이 실시간 보도되는 지구촌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간다. 의사전달 능력과 토론능력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정치가들이 원하는 소통의 기본은 언어에 있다. 혹은 명료하게 혹은 화려하게 혹은 단호하고 때로는 부드럽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야말로 정치가의 생명줄이다. 정치 지망생들이여, 토론공부 좀 하시라. 그것은 언제나 당신의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므로.

하되, 누군가는 말한다. “토론 잘 한다고 정치 잘하는 것도 아닌데, 기대하지 말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