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차돈 순교와 불교왕국의 태동 ④

▲ 이차돈이 순교했을 때 날아간 머리가 떨어졌다는 백률사. 법흥왕 이후 신라는 불교왕국으로 번성했다. 소금강산 울창한 대숲 인근에 지어진 백률사의 모습을 상상과 현실을 결합해 그렸다. <br /><br />삽화/이건욱
▲ 이차돈이 순교했을 때 날아간 머리가 떨어졌다는 백률사. 법흥왕 이후 신라는 불교왕국으로 번성했다. 소금강산 울창한 대숲 인근에 지어진 백률사의 모습을 상상과 현실을 결합해 그렸다. 삽화/이건욱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掘佛寺址 石造四面佛像)을 지나 백률사(栢栗寺)로 오르는 길. 가쁜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경주 동천동에 자리한 소금강산은 험하고 높은 산이 아니다. 그러나, 기상청의 예보처럼 “한여름 같은 불볕더위”가 5월 하순의 산과 숲을 뒤덮고 있었다.

얼굴과 목덜미로 연신 땀이 흘러내렸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빼곡히 대나무가 들어찬 숲 아래 그늘로 몸을 숨겼다. 청아한 신록이 지친 마음과 더운 날 산을 오르는 스트레스를 위로해줬다.

오가는 사람들이 드문 산길. 잠시 잠깐의 조용한 휴식 속에서 `논어` 자로편(子路篇)의 인상적인 구절이 옛날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올랐다. `其身正 不令而行 其身不正 雖令不從(기신정 불령이행 기신부정 수령부종)`.

법흥왕과 이차돈의 관계를 설명하기에 적당한 문장이었다. 이를 풀어서 해석하면 “옳은 뜻을 가진 자는 애써 명령하지 않아도 따르는 사람이 있으나, 그렇지 못한 자는 명령을 해봐야 그것에 따르는 이가 없다”가 아닌가.

6세기 초반. 법흥왕은 불교를 받아들여 왕권을 강화하고, 신라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를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불교의 공인을 위해 누군가 나서 희생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왜냐?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생명을 버리라고 말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기에.

스물한 살 청년 이차돈은 법흥왕이 `옳은 뜻`을 가진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랬기에 순교를 자처할 수 있었다. 명령을 받지 않고도 자신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목숨까지 바친 것이다. 바로 이 법흥왕과 이차돈의 이심전심(以心傳心)이 신라가 불국정토로 가는 길을 열었다.

설화에 의하면 백률사는 순교자 이차돈의 베어진 머리가 날아가 떨어진 자리에 지어졌다. 백률사 주위에는 지조를 상징하는 대나무가 거대한 숲을 이루고 있다. 이차돈의 삶과 죽음, 그것과 잘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 현재의 백률사는 대웅전과 요사채로 이뤄진 작은 규모의 절이다.
▲ 현재의 백률사는 대웅전과 요사채로 이뤄진 작은 규모의 절이다.

▲ 현재는 작은 사찰 옛날엔 `불교 성산`으로 불려

신라의 불교 공인에 큰 역할을 한 이차돈과 관계있는 사찰이니 백률사의 위상은 그 어느 절보다 높았다. 또한, 경주 사람들은 불력에 의한 영험한 기적이 자주 일어난 곳으로 백률사를 기억한다. 그래서일까? 전해오는 옛이야기 또한 많이 간직한 장소가 소금강산과 백률사다.

절이 세워진 소금강산 기슭에는 앞서 말한 대로 `석조사면불상`이 위풍당당하게 솟아 있다. `삼국유사`는 이 독특한 불상을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 백률사로 오르는 소금강산 초입엔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이 웅장한 모습으로 서 있다.
▲ 백률사로 오르는 소금강산 초입엔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이 웅장한 모습으로 서 있다.

“신라시대 경덕왕이 백률사를 찾기 위해 소금강산에 이르렀다. 왕의 행렬이 어느 한 지점을 지날 때 땅속에서 불경 소리가 들렸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경덕왕의 신하들이 땅을 파자 커다란 바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왕은 바위의 사면에 불상을 새기라고 명했고, 그 자리에 절을 지었다. 절의 이름인 굴불사는 땅에서 불상을 파냈다는 의미다.”

굴불사는 이제 터만 남았다. 하지만, 높이가 3m에 육박하는 바위에는 그때 새겨진 `아미타삼존불(阿彌陀三尊佛)`, `약사여래좌상(藥師如來坐像)`, `관세음보살입상(觀世音菩薩立像)` 등이 아직도 남아 이곳이 신라불교의 성지 중 한 곳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멈췄던 발걸음을 재촉해 백률사 입구 계단에 도착했다. 1천 년 전 창성했던 사찰의 흔적은 많은 부분 사라졌다. 2017년 초여름에 만난 백률사는 대웅전과 요사채 정도만으로 이뤄진 작고 소박한 사찰이었다. 절을 찾은 사람들에게 이차돈의 머리가 날아와 떨어졌다는 장소가 대략 어디쯤인지를 물었으나, 시원스러운 대답을 들려주는 이는 없었다.

 

▲ 울창한 대숲을 지나 가파른 길을 올라가면 이차돈의 순교설화가 살아 숨 쉬는 백률사가 기다리고 있다.
▲ 울창한 대숲을 지나 가파른 길을 올라가면 이차돈의 순교설화가 살아 숨 쉬는 백률사가 기다리고 있다.

▲ 이차돈 흔적 찾을 수 없으나 `정신`은 남아

동국대학교 강석근 교수의 논문 `백률사 설화와 제영(題詠)에 대한 연구`는 백률사가 건립될 당시의 상황과 역사적 위상에 관해 이렇게 쓰고 있다. 다소 길지만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대로 인용한다.

“경주의 소금강산(해발 177m)에 있는 백률사는 신라 불교의 대표 유적지다. 아울러 이 절은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와 함께 이차돈의 순교 현장이다.

법흥왕 14년(527년)에 불교가 공인된 이후 이차돈은 법흥왕과 함께 불교 공인의 주인공으로 병칭돼 왔다. 이차돈은 스스로 불교를 위해 참형을 받았다. 그때 그의 목이 날아가 소금강산에 떨어졌고, 목에서는 흰 젖이 솟아나는 이적(異跡)이 일어났다.

이후 신라의 이차돈 추모자들은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소금강산에 백률사를 세우고, 산정에 무덤을 조성했다. 이후 해마다 이차돈의 기일인 8월 5일이 되면 추모자들이 무덤가에 모여 제사를 올렸다. 이 같은 이차돈 추모의 전통과 열기는 고려 후기까지 지속됐다. 백률사는 이러한 역사적·설화적 배경을 가진 한국 불교의 성산(聖山)이다.”

▲ 백률사임을 알리는 비석이 사찰 계단 아래 세워져 있다.
▲ 백률사임을 알리는 비석이 사찰 계단 아래 세워져 있다.

요사채 앞 수돗가에서 더위에 달아오른 얼굴을 씻어내고, 백률사 경내와 주위를 찬찬히 돌아봤다. 절의 이름을 알려주는 비석을 발견했고, 일찍 찾아온 여름에 놀란 매미 몇 마리의 청명한 울음소리를 들었다.

대웅전 앞뜰엔 무슨 행사가 준비되고 있는 것인지 하얀 천막이 세워져 있었다. “대웅전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석벽에 삼층탑이 오목새김(음각) 돼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유심히 살폈으나 몇 세기에 걸친 세월과 세파에 닳아 그 형상을 제대로 알아볼 수는 없었다.

백률사 범종에는 이차돈의 순교 장면이 새겨져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차돈 순교비` 또한 백률사에서 발견됐다.

한국고대사탐구학회가 발행한 이도흠의 논문 `이차돈의 가계와 신라의 불교 수용`에선 이차돈의 죽음을 “이중적”이라고 적고 있다. “법흥왕과의 사적 관계를 감안할 때 이차돈의 죽음은 불교 공인을 위한 자발적인 순교인 동시에 형벌이기도 했다”는 것.

관련 서적과 논문을 읽고, 그의 흔적이 남겨져 있다는 현장을 찾아다닐수록 이차돈에 관한 궁금증은 커져만 가고 있었다. 백률사 북쪽에 있다는 `삼존마애불좌상`을 찾아 다시 산길을 걸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대숲에선 어리고 착한 짐승이 울고 있었다.

 

▲ `순교자` 이차돈의 잘린 머리가 떨어졌다는 백률사에서 발견돼 1930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진 금동약사여래입상은 국보 28호다.
▲ `순교자` 이차돈의 잘린 머리가 떨어졌다는 백률사에서 발견돼 1930년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진 금동약사여래입상은 국보 28호다.

이차돈 모습이 겹치는 `금동약사여래입상`

경주시 인왕동에 자리한 국립경주박물관. 그 옛날 신라 사람들의 미적 감각에 놀라며 전시관을 돌아보던 외국인 관광객 몇 사람의 발걸음이 양손이 떨어져나간 조각품 앞에서 멈췄다. `이게 뭘까?`라는 궁금증으로 기자의 발길 또한 거기에 머물렀다.

국보 제28호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銅藥師如來立像·이하 약사불)이었다. 177cm라는 높이가 어지간한 남성의 키보다 커 보였다. 알다시피 백률사는 법흥왕 때 순교한 이차돈의 머리가 날아가 떨어졌다고 전해지는 소금강산에 위치한 사찰이다.

수많은 설화가 전해오고, 불심을 통한 기적이 수차례 일어났다고 알려진 백률사에 그 모습도 수려하게 서 있던 약사불. 신라의 불교 성지 중 하나인 백률사와 참으로 잘 어울리는 불상이다. 약사불이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진 것은 1930년.

몸에 비해 머리가 크지 않은 약사불은 인간의 신체비례와 거의 유사하게 만들어졌다. 원만한 둥근 얼굴에서 풍겨오는 인자함과 기다란 눈썹, 거기에 조그만 입과 오뚝한 코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친근함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한마디로 평범한 듯하면서도 우아하다.

비단 약사불의 몸만이 아니었다. 옷자락의 표현까지 섬세했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납의(衲衣·승려의 옷)의 나붓거리는 사실감이 천년의 세월을 아무렇지도 않게 훌쩍 뛰어넘고 있었다. 장중한 무게감과 동시에 약동하는 예술성이 느껴졌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밀려왔다. “손에 의술을 행할 도구나 약병을 들지 않았는데 왜 이 불상을 사람들의 병을 고쳐준다는 약사불이라 칭하는 걸까?” 이에 대한 해답은 약사불에 관한 문헌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런 설명이다.

“일제강점기에 간행된 한국 문화재 사진집인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에선 약사불의 왼손에 들린 약단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잘려져 어디론가 사라진 양손이 온전할 때 경주 사람들이 불렀던 이름 `약사불`이 지금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자세하게 약사불을 살폈다. 군데군데 푸른색과 녹색, 그리고 붉은색의 상처 비슷한 흔적이 보였다. 불상 겉면의 색채가 다른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이에 관해 고미술품 전문가들은 “부처의 몸에서는 금빛이 난다는 이야기에 따라 처음에는 도금(鍍)을 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도금이 벗겨졌고, 이후 불상에 채색을 한 흔적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이차돈의 죽음 이후 백률사에 봉안된 약사불.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줬다는 이 불상은 `타애(他愛)`와 `희생`이라는 측면에서 젊은 순교자 이차돈과 닮아 있었다.

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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