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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피 대신 솟은 흰 젖 젊은 순교자, 새 생명을 얻다

기사승인 2017.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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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차돈 순교와 불교왕국의 태동 ⑤

   
▲ 삼존마애불좌상 앞에 동승의 모습을 한 인형들이 놓였다. 어떤 간절한 기원이 사람들을 이곳까지 오게 했을까?

사진/이용선기자photokid@kbmaeil.com
 

동화책을 읽던 어린 시절처럼 상상력을 동원해본다. 아마 이런 장면이었을 것이다.

뜨거운 햇살이 쏟아지는 8월 초순. 서라벌 소금강산 정상.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스물한 살 청년 순교자 이차돈`의 유택(幽宅) 앞에 모인 수백, 수천 명의 신라 사람들. 그들의 추모 열기는 염천의 하늘보다 높고 뜨거웠다.

백률사는 법흥왕 14년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던진 이차돈의 순수한 열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찰이다. `삼국유사` 등에는 자추사(刺楸寺)라는 이름으로 적혀 있지만, “오늘의 백률사는 자추사의 바뀐 이름”이라는 것이 역사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다.

안타깝게도 신라시대에 축조된 웅장했을 백률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 이후 다시 지어진 백률사 대웅전은 맞배지붕에 목조 기와를 얹은 단층의 소박한 건물. 그 옛날 영화는 느껴지지 않지만, 신념을 위해 순교한 청년을 떠올리게 하는 경건함은 여전하다.

종교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절대자에 대한 의심 없는 믿음에 가깝다. 제사나 제의(祭儀)라고 이름 붙여진 종교양식은 비단 이차돈을 높이 모셨던 불교도들만의 행위는 아니다.

이슬람교를 만든 마호메트가 태어난 메카(Mecca)를 향한 무슬림들의 맹목적인 열정, `메시아(Messiah)`로 섬기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바치는 기독교도들의 간절한 마음도 그 형식은 달리하지만 내용적으론 유사한 성질의 것이다.

이차돈 순교 직후부터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시대까지 백률사 인근 이차돈의 무덤에서 이어진 제사를 동국대 강석근 교수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신라 중기부터 고려 말까지 이차돈을 추모하는 단체와 사람들의 모임이 1천 년 이상 지속됐다. 이들의 추모 열기와 숭앙심은 절대적이었다.”

강 교수는 그의 논문 `백률사 설화와 제영에 대한 연구`에서 이차돈과 백률사가 신라 역사 연구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는지도 설명한다. 강 교수의 학설에 따르면 “이차돈의 순교는 신라의 정치사와 종교사에서 획기적 사건”이다. 또한, “경주의 소금강산과 백률사의 주인공은 이차돈”이다. 그렇기에 이차돈에 대한 연구는 백률사에 대한 연구와 다름없고, 뒤집어 말하면 백률사에 대한 연구는 곧 이차돈에 대한 연구가 된다.

  ▲ 소금강산 동쪽에 위치한 `삼존마애불좌상`.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현재는 바위에 새겨진 부처의 명확한 형태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 소금강산 동쪽에 위치한 `삼존마애불좌상`.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현재는 바위에 새겨진 부처의 명확한 형태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 이차돈 흔적을 찾다가 발견한 `범종각` `삼존마애불좌상`

초여름 열기를 뿜어내는 흙길을 걸어 백률사에 도착하고서부터 “어디쯤 이차돈의 흔적이 남아 있을까” 하고 혼잣말을 하며 경내는 물론 주위까지 두리번거렸다. 그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백률사 범종각(梵鐘閣)이다. 절의 규모에 비해 제법 큰 종이 매달려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종의 겉면에 이차돈 순교 당시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머리와 분리된 몸에서는 흰 젖이 치솟고, 떨어진 머리는 연꽃 위에 조용하게 얹혀 있었다. 연꽃의 꽃말은 `순결한 아름다움`이다. 또한, 불교에선 연꽃을 신성시해 부처상이 앉은 좌대(座臺)를 연꽃으로 장식하기도 한다.

신라가 불교왕국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이차돈은 백률사 범종의 조각에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고 있었다. `기억되는 죽음은 슬프지 않다`란 역설적인 문장이 떠올랐다.

절의 왼편으로 조성된 산책로를 따라 5분쯤 걸었을까? 사람 키보다 두어 배 높아 보이는 바위에 가부좌를 튼 3명 부처의 돋을새김이 기자의 발길을 붙들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4호인 동천동 삼존마애불좌상(三尊磨崖佛坐像)이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조각된 것으로 추정되는 불상은 천년 세월에 닳고 또 닳아 지금은 정확한 형태를 알아보기가 힘들다. 학계는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바위에 새겨진 세 가지 형상이 아미타불(阿彌陀佛), 관음보살(觀音菩薩),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바위의 일부분이 떨어져나가고, 푸르고 거무스레한 이끼가 부처의 모습을 덮고 있어 신라인이 새긴 예술적 불상의 진면목을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으나, 마음으로는 넉넉한 인품을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었다.

  ▲ 527년 이차돈이 순교한 이후 그를 추모하는 이들은 해마다 무덤이 있었던 것으로 전하는 백률사를 찾아 제사를 올렸다. 이 제사는 유교를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인 조선 건국 이전까지 이어졌다. 상상력을 통해 그 제사 광경을 그림으로 옮겼다. 삽화/이건욱  
▲ 527년 이차돈이 순교한 이후 그를 추모하는 이들은 해마다 무덤이 있었던 것으로 전하는 백률사를 찾아 제사를 올렸다. 이 제사는 유교를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인 조선 건국 이전까지 이어졌다. 상상력을 통해 그 제사 광경을 그림으로 옮겼다. 삽화/이건욱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치성을 드리는 것인지, 삼존마애불좌상 주위에는 부처상과 동승(童僧)의 모습을 한 조그만 인형들이 즐비했다. 경주 사람들 저마다의 간절한 바람이 만들어놓은 색다른 풍경으로 느껴졌다.

`불교평론 학술상`을 수상한 동국대학교 이봉춘 명예교수는 “이차돈의 설화를 기록 그대로 믿지는 않지만, 그의 순교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은 드물다”고 말했다.

이봉춘 교수에 따르면 이차돈 이전에도 순교자는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신라에 불교를 전하러 온 고구려의 승려들이었다. 이와 달리 이차돈의 순교는 “전도 승려들이 살해된 것과 달리 불심 깊은 신라의 일반 신자가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라는 것이 이 교수 설명이다.

신라시대부터 시작돼 오늘날까지 그 흔적을 남기고 있는 이차돈에 대한 뜨거운 추모의 마음은 바로 이 `자발성`에서 연유한 것이 아닐까?

  ▲ 백률사 범종각. 조용한 산사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가 청아했다.  
▲ 백률사 범종각. 조용한 산사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가 청아했다.

▲ 불교를 신라 주도 이데올로기로 만든 이차돈 순교

`삼국사기` `삼국유사` `해동고승전` 등 이차돈의 죽음을 기록한 역사서들은 한결같이 “잘린 이차돈의 목에서 붉은 피가 아닌 흰 젖이 솟아났다”고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흰 젖`은 무엇의 은유일까? 강석근 교수의 논문은 이 물음에 아래와 같이 답하고 있다.

“죽음과 절망을 상징하는 붉은 피가 아닌 갓난아기가 먹는 흰 젖이 솟았다는 것은 이차돈의 순교가 생명과 재생의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말해준다.”

  ▲ 백률사 범종에 새겨진 이차돈의 순교 장면.  떨어진 머리가 연꽃 위에 올라있다.  
▲ 백률사 범종에 새겨진 이차돈의 순교 장면. 떨어진 머리가 연꽃 위에 올라있다.

다수의 역사학자들은 이차돈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527년 이후 신라의 불교는 종교로서의 의미를 뛰어넘어 신라사회를 주도하는 이데올로기로 변화해나갔다고 입을 모은다.

강 교수 역시 “이차돈 순교 이후 법흥왕과 진흥왕이 펼친 불교 진흥정책은 신라를 종교적·사상적으로 결속시켰고, 이는 삼국통일을 견인하는 촉매제가 됐다”고 쓰고 있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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