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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의 나루` 여진, 역사의 흥망성쇠를 강물에 실어 나르다

등록일 2017-09-21   게재일 2017-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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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미 품은 낙동강 이야기 ⑵ 구미의 나루터

   
▲ 구미 비산나루의 옛 모습. 언제 촬영된지는 알수 없지만, 당시의 나루터가 서민들이 먹고 사는데 꼭 필요한 장소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구미시 제공
 

낙동강 본류 중간점인 구미지역 나루터
물류거점지 역할로 큰 시장 형성되기도

시, 나루문화 보전 `동락신나루` 조성
수변문화공원·나룻배 전망대 등
시민 레저문화생활공간으로 재탄생



□ 지역 주요물산 물류기지 역할

구미지역은 예로부터 낙동강이 중앙을 가로 흘러 동서로 분리가 되어있어 나루의 역할이 중요했다.

또한 낙동강 본류의 중간 기착지로서의 역할은 더욱 절실한 곳이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지역의 물류 거점지로서의 역할을 맡게 됐다.

강나루에 조창(漕倉)이나 사창(社倉), 염창(鹽倉)을 지어 세곡이나 공물 또한 필요 품목을 받아들이거나 출하시키는 일을 했다. 원리의 강창(江倉)은 선산부의 하운창(河運倉)으로, 강변 지역의 여러 사창, 염창역 등이 물류기지의 역할을 했다.

  ▲ 전통나루문화 활용을 통한 강변관광문화개발을 위해 마련한 동락신나루 전경.  
▲ 전통나루문화 활용을 통한 강변관광문화개발을 위해 마련한 동락신나루 전경.

나루를 통해 각 지역의 주요 산물이 출하되고 상선들이 외지산 거래 산물을 하력시켜 물품을 팔고 하면서 인근에 시장이 형성되기도 했다. 비산나루와 강정나루, 계동나루, 이곡나루가 대표적이다. 외국 사신 접견과 영접지로 사용되기도 했다.

선산부의 관문에 월파정을 지어 사신들을 직접 영접한 여진(여차니진)이 있다. 교통의 중심지이다보니 나라의 위난 시에는 도하를 위한 요충 및 격전지이기도 했다. 낙동강에는 고대부터 근대까지 수십개의 나루가 시대에 따라 존폐를 거듭해 왔다.

구미지역에 몇 개의 나루가 있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견탄진, 원흥진, 월굴진, 신풍진, 송당진, 태조진, 용산진, 월파진, 도부진, 강창진, 강정진, 계동진, 비산진, 동락진, 오포진 등이 대표적인 나루로 꼽히고 있다.

  ▲ 구미시가 지난 2015년 개장한 동락신나루에 전시된 나루의 모습.  
▲ 구미시가 지난 2015년 개장한 동락신나루에 전시된 나루의 모습.

□ 고려 태조 왕건의 나루 여진(余津)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 부근의 여진(余津)은 여차리진(余次里津), 여차니진(余次尼津), 월파진(月波津) 등 여러 이름으로 표기 돼 왔다.

대동여지도에는 여차리진(余次里津), 동비여고에는 여차니진(余次尼津), 경상도속찬지리지에는 월파정진 등으로 각각 자료마다 다른 이름으로 명기돼 있으나 최초의 이름인 여진으로 지금까지 불리고 있다.

이 나루의 이름이 여진으로 된 연유는 고려 태조 왕건이 936년 선산읍 생곡리 앞 지금의 일선교 근처 태조방천으로 불리는 낙동강 연안에서 견훤과 후삼국 통일을 위한 싸움에서 크게 이겼기 때문이다.

당시 설화에 따르면 고려군과 후백제군은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접전을 벌였다. 왕건은 냉산의 숭신산성에 진을 치고 낙동강 건너편 견훤과 대치하면서 수차례 공격을 했으나 쉽지 않았다. 그때 이곳을 지나던 한 기인이 말하길 “견훤은 지렁이의 화신이라 물속에서 기운이 펄펄나니 물속에 소금을 풀어 놓으면 견디지 못 할 것입니다”고 했다.

이에 왕건은 수백 가마의 소금을 강에 풀었고, 그 사실을 모르고 물에 뛰어든 견훤은 몸이 오그라들어 혼비백산하며 달아났다고 한다. 이를 놓치지 않고 왕건이 총공격을 퍼부어 대승을 거두게 된다.

대승을 거둔 왕건은 낙동강을 건너면서 “이 나루는 나의 나루”라고 소리쳤다고 하여 여진으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여진나루는 고려 말기 개설된 관도(官道) 서을~조령~상주~선산~동래로 연결되는 영남최대 육상 물류망인 영남대로와 연결되는 낙동강수로로서 물류 중심지역으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세종실록지리지(1432년 세종14)`에 낙동강 통관 주요 나루 8개 중 낙동강 상류에서 첫 번째 나루로 표기가 돼 있으며, `경상도속찬지리지`에도 주요 나루로 등록돼 있다. 근세기까지 선산의 주요 관문으로 이용된 가장 오래된 나루라고 할 수 있다.

  ▲ 동락신나루에는 낙동강 나루에서 사용되었던 나룻배가 재현, 전시돼 있다.  
▲ 동락신나루에는 낙동강 나루에서 사용되었던 나룻배가 재현, 전시돼 있다.

□ 소통의 중심지 비산(飛山)나루

비산(飛山)의 원래 이름은 비산(緋山)이었다고 전해진다. 지역의 흙이 붉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는데 일제 시절 비산(飛山)으로 개칭됐다고 한다.

지금의 비산은 신라시대부터 선산부(일선군) 소속으로 남부지역의 수운하와 동서 교통의 요충지였다. 또 신라 명장 김유신이 백제 정벌을 위해 660년 신라군인 5만명을 거느리고 군위 효령 장군동을 거쳐 구미 비산나루를 지나 김산을 거쳐 진군을 했다고 기록돼 있어 예로부터 중요한 교통의 요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비산나루는 선산부의 남부지역 관문 역할을 했다. 물자교역과 각 지역에서 모여드는 사람들의 상거래의 중심지로, 또 부산 등의 하도에서 올라오는 상선이 소금과 해산물 등을 하역했고, 내륙지방에서 생산된 농산물과 수공업품, 도자기 등이 판매됐다.

이로 인해 지역 상거래 중심의 `갈뫼시장`이 생기게 된다. 선산부의 남부지역 시장으로 20세기 전반까지 크게 번성했다. 지금의 비산동 417번지 일대로 현재는 농경지가 조성돼 있다.

근대의 비산나루는 강동지역의 양포동, 거의동, 옥계동과 산동, 장천 등지의 주민과 학생, 근로자, 농민들이 낙동강을 건너 구미, 김천 등지의 시장과 공단의 직장을 출·퇴근, 등·하교의 용무로 많이 이용하던 나들목이었다.

특히, 1970년대 구미공업단지가 조성되면서 주말이면 매일 400~500명의 근로자들이 양호동 강가 버들 숲에서 휴식을 취하기 위해 배를 많이 이용했다.

  ▲ 동락신나루에서 바라본 낙동강 모습.<br /><br />/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 동락신나루에서 바라본 낙동강 모습.

/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 나루의 퇴진과 동락신나루

예로부터 낙동강은 국가의 공물과 조세가 통과해야하는 곳이었고, 해수산물을 실은 화물선이 북쪽 지역으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하는 교통로였다.

하지만, 1894년 갑오경장으로 조선시대 공부제도가 현물에서 금납제로 바뀌고, 1905년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나루의 역할은 점점 좁혀져 갔다.

지역에서도 1967년 용산나루터에 일선교 건설을 시작으로, 여러 대교들이 들어서면서 나루는 빠른 속도로 폐기 됐고, 1980년대 완전히 그 모습이 사라졌다. 다만, 용산나루터, 비산나루터, 동락나루터 부근에 아직까지 강나루 매운탕 식당들이 음식문화를 이어가고 있어 이 곳이 나루터가 있었던 자리였음을 짐작케 할 뿐이다. 이에 구미시는 나루의 문화를 조금이나마 보전하고자 지난 2015년 4월 8일 동락공원 부근에 동락신나루 문화벨트 사업을 완료했다.

이 사업은 구미시가 2011년 당시 문화체육관광부의 옛 전통나루문화 활용을 통한 강변관광문화개발계획에 따라 총사업비 48억원을 투입해 비산나루 중심으로 추진하다 사업부지 및 진입로 확보가 어려워 동락나루로 변경한 것이다. 기존에 조성된 동락공원과 낙동강수상레포츠체험센터와 연계해 수변 문화공원으로 꾸며진 동락신나루는 낙동강을 조망할 수 있는 나룻배 형상의 전망대, 돛을 상징하는 조형물, 야간조명이 어우러진 바닥분수, 구미과학관으로 가는 산책로 등이 조성돼 있다. 옛날 나루터가 서민들이 먹고사는데 기반을 둔 장소였다면 이제는 시민들이 레저문화생활공간으로 이용되는 곳으로 새롭게 바뀌고 있다.

/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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