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명성 한동대 언론정보문화학부 4년

독일의 작가 귄터 그라스는 자신의 나치군 복무 경험을 소설로 옮기며 이렇게 말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수시로 멈칫거리며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무지해서 나는 심각한 범죄에 가담했던 것이다.”

그의 소설 `양철북`에서 나치 집권 시기 독일에서 일어나고 있던 일들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았던 자신이 지은 `무지의 범죄`를 반성하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나 `지성의 시대`라고 일컫는 현대사회 속에서 `진리`를 가르친다는 한국의 기독교는 애석하게도 `무지`, 혹은 `반지성`의 질곡으로 향하고 있다.

최근 들어 이슈로 부상하는 이슬람과 동성애자, 그리고 여성을 향한 미움과 혐오의 중심에 서서 사회적으로 기독교가 지탄을 받는 이유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작년 초 익산시 할랄단지에 관한 카카오톡 메시지가 떠돌기 시작했다.

익산에 할랄단지가 조성될 것이고 수많은 무슬림들이 나라의 지원을 받으며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될 것이라서 우리나라는 앉아서 이슬람에게 `먹힐 것`이라는 메시지였다.

재미있는 사실은 출처도 분명하지 않은 정보들을 통해 이슬람에 대한 근거없는 공포를 조장하였던 이 메시지의 내용 대부분이 사실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슬람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보이는 학자이자 선교사인 김동문 목사는 한 언론기사에서 이들 메시지를 조목조목 분석하며 “이들이 제기하는 주장은 대부분 사실이 왜곡된 것”이라면서 깊은 우려를 표명하였다.

그는 또 다른 언론 인터뷰에서“거짓을 바탕으로 혐오감을 드러내는 집단행동은 사회적으로 옳지 않으며, 이는 반사회적인 범죄인 동시에 비성경적인 처사”라면서 왜곡과 곡해로 점철된 정보공유를 통해 `카톡교`에 다다른 기독교인들의 자성을 요청하였다.

기독교의 `반지성주의`는 도를 넘었다. 가장 비근한 사례는 바로 최근 박성진 중소기업벤처부 장관 후보자의 `창조과학`논란이다.

이제까지 여성과 소수자 인권을 접근하는 방식에서 부적절함과 부족함을 보이며 내부의 결속력을 다져왔던 기독교가 이제는 `창조과학`을 기치로 내걸며 과학이라는 다수로부터 자신들이 핍박당하고 있다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창조과학도 그 면면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 또한 왜곡과 체리피킹(본인의 논증에 유리한 사례들만 취사선택하는 행위)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들의 주장은 과학을 통해 신을 증명할 수 있다고 하면서 전형적 순환논리와 자기모순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장관후보자가 자진사퇴하며 사건은 일단락되었지만 `비지성적 기독교`를 향한 대중의 시선은 여전히 싸늘한 상태이다.

무책임한 반지성주의로는 더 이상 그 누구도 설득할 수 없다.

“의심하지 않는 신앙은 악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편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주인공 윌리엄 수사는 자신의 제자인 아드소에게 이렇게 말한다.

모든 영역에서 합리적인 비판과 의심은 필요한 것이다. 종교도 성역일 수 없다. 기독교는 `복음`을 이야기한다.

영어로 `Good News`. 하지만 현재 보수근본주의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단체들이 만들어내는 뉴스들은 소위 `Fake News`나 다름없다.

의도적인 체리피킹과 왜곡, 그리고 곡해는 도를 넘었으며 정치와 사회, 과학에까지 미친 기독교의 무지와 반지성에 대중들은 비난을 퍼붓고 있다.

종교와 믿음의 이름으로 합리적 비판과 의심을 저해하는 행태는 큰 문제인 것이다.

종교는 `진리`를 가르치는 영역이다. 이제는 `진리`와 함께 `사실`을 이야기해야 한다.

`진리`로 가장한 거짓을 가르치며 그들만의 성채를 쌓아 올리는 일은 사라져야 할 것이다.

기독교는 인간에게 신과의 만남을 통하여 가지게 될 평온과 행복을 약속하는 종교가 아니었던가.

더 이상 비지성적인 주장과 편협한 교리를 주입하여 오히려 반목과 혐오가 조장되는 일은 사라져야 할 것이다. 더 나은 기독지성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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