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작가 귄터 그라스는 자신의 나치군 복무 경험을 소설로 옮기며 이렇게 말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수시로 멈칫거리며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무지해서 나는 심각한 범죄에 가담했던 것이다.”
그의 소설 `양철북`에서 나치 집권 시기 독일에서 일어나고 있던 일들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았던 자신이 지은 `무지의 범죄`를 반성하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나 `지성의 시대`라고 일컫는 현대사회 속에서 `진리`를 가르친다는 한국의 기독교는 애석하게도 `무지`, 혹은 `반지성`의 질곡으로 향하고 있다.
최근 들어 이슈로 부상하는 이슬람과 동성애자, 그리고 여성을 향한 미움과 혐오의 중심에 서서 사회적으로 기독교가 지탄을 받는 이유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작년 초 익산시 할랄단지에 관한 카카오톡 메시지가 떠돌기 시작했다.
익산에 할랄단지가 조성될 것이고 수많은 무슬림들이 나라의 지원을 받으며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될 것이라서 우리나라는 앉아서 이슬람에게 `먹힐 것`이라는 메시지였다.
재미있는 사실은 출처도 분명하지 않은 정보들을 통해 이슬람에 대한 근거없는 공포를 조장하였던 이 메시지의 내용 대부분이 사실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슬람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보이는 학자이자 선교사인 김동문 목사는 한 언론기사에서 이들 메시지를 조목조목 분석하며 “이들이 제기하는 주장은 대부분 사실이 왜곡된 것”이라면서 깊은 우려를 표명하였다.
그는 또 다른 언론 인터뷰에서“거짓을 바탕으로 혐오감을 드러내는 집단행동은 사회적으로 옳지 않으며, 이는 반사회적인 범죄인 동시에 비성경적인 처사”라면서 왜곡과 곡해로 점철된 정보공유를 통해 `카톡교`에 다다른 기독교인들의 자성을 요청하였다.
기독교의 `반지성주의`는 도를 넘었다. 가장 비근한 사례는 바로 최근 박성진 중소기업벤처부 장관 후보자의 `창조과학`논란이다.
이제까지 여성과 소수자 인권을 접근하는 방식에서 부적절함과 부족함을 보이며 내부의 결속력을 다져왔던 기독교가 이제는 `창조과학`을 기치로 내걸며 과학이라는 다수로부터 자신들이 핍박당하고 있다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창조과학도 그 면면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 또한 왜곡과 체리피킹(본인의 논증에 유리한 사례들만 취사선택하는 행위)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들의 주장은 과학을 통해 신을 증명할 수 있다고 하면서 전형적 순환논리와 자기모순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장관후보자가 자진사퇴하며 사건은 일단락되었지만 `비지성적 기독교`를 향한 대중의 시선은 여전히 싸늘한 상태이다.
무책임한 반지성주의로는 더 이상 그 누구도 설득할 수 없다.
“의심하지 않는 신앙은 악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편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주인공 윌리엄 수사는 자신의 제자인 아드소에게 이렇게 말한다.
모든 영역에서 합리적인 비판과 의심은 필요한 것이다. 종교도 성역일 수 없다. 기독교는 `복음`을 이야기한다.
영어로 `Good News`. 하지만 현재 보수근본주의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단체들이 만들어내는 뉴스들은 소위 `Fake News`나 다름없다.
의도적인 체리피킹과 왜곡, 그리고 곡해는 도를 넘었으며 정치와 사회, 과학에까지 미친 기독교의 무지와 반지성에 대중들은 비난을 퍼붓고 있다.
종교와 믿음의 이름으로 합리적 비판과 의심을 저해하는 행태는 큰 문제인 것이다.
종교는 `진리`를 가르치는 영역이다. 이제는 `진리`와 함께 `사실`을 이야기해야 한다.
`진리`로 가장한 거짓을 가르치며 그들만의 성채를 쌓아 올리는 일은 사라져야 할 것이다.
기독교는 인간에게 신과의 만남을 통하여 가지게 될 평온과 행복을 약속하는 종교가 아니었던가.
더 이상 비지성적인 주장과 편협한 교리를 주입하여 오히려 반목과 혐오가 조장되는 일은 사라져야 할 것이다. 더 나은 기독지성을 만나고 싶다.
본지 `대학생 논단` 코너에서는 대구·경북 지역 대학생들의 사회, 문화, 정치 등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환영합니다. 200자 원고지 9.5매의 글을 이메일(hjyun@kbmaeil.com)로 사진과 함께 보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