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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보리밭

등록일 2018-01-11   게재일 2018-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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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병래<br /><br />수필가·시조시인  
▲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겨울 보리밭을 보러 간다. 보릿고개와 함께 보리밭도 거의 사라져서 이제는 보기가 쉽지 않다. 식량이 턱없이 부족했던 시절에는 겨울이면 온 들판이 다 보리밭이었다. 밭은 물론 벼를 베어낸 논에까지 이모작으로 보리를 심었다.

혹한의 겨울에도 끝내 푸른빛을 놓지 않고 견디었다가 봄이면 제일 먼저 생기를 띠고 자라나서 이 땅에 봄이 왔음을 알려주던 보리밭. 가냘픈 보리 싹이 얼어붙은 땅에 뿌리를 내리고 월동하는 보리밭이 내게는 추사(秋史)의 세한도(歲寒圖)보다도 훨씬 더 마음에 와 닿는 세한의 풍경이다.

이 땅에 살아있는 생명들은 모두 겨울이 닥치기 전에 월동준비를 한다. 풀들은 서둘러 씨앗을 남기고 생을 마감하고 나무들은 잎을 다 지우고 수액이 얼지 않게 몸 안의 수분을 줄여 최대한 빙점을 낮춘다. 잎을 지우지 않고 겨울을 나는 상록수들도 두꺼운 잎이나 바늘잎으로 단단히 채비를 하고. 동물들도 털갈이를 하거나 땅속에서 동면을 한다. 곤충들은 대부분 알을 남기고 생을 마친다.

그런데 보리는 거꾸로 가을에 싹을 틔우고 벌거벗은 아이처럼 어리고 여린 잎으로 겨울을 난다. 땅마저 어린뿌리에 서릿발 칼날을 들이대는데 보다 못한 하늘이 눈이라도 내리면 차가운 눈을 솜이불인 양 덮고 삭풍을 피한다. 흔히들 서리를 맞고 핀 국화를 오상고절(傲霜孤節)이라 하고, 겨울에도 잎이 푸른 송죽(松竹)의 기상과 절개나 눈 속에서 꽃을 피우는 동백과 매화의 단심과 고결을 찬양하지만 어찌 저 겨울보리의 막무가내에 비길 것인가. 절개니 품격이니 하는 수사가 오히려 사치스러운 저 어처구니없는 맹목은 무엇이란 말인가.

한 사발의 보리밥이 무엇보다 절실하던 시절이 있었다. 멀건 나물죽으로도 가파른 보릿고개를 넘지 못하면 아직 다 여물지도 않은 보리를 베어다 풋바심을 했다. 설익은 보리 이삭을 솥에 쪄서 말렸다가 절구에 찧으면 풋바심한 보리쌀이 되었다. 그걸로 밥을 지으면 껍질이 말끔히 벗겨지지 않아 입안 감촉이 좀 껄끄럽고 보리풋내가 나긴 하지만 허기진 배를 채우기엔 더 바랄 게 없었다.

반세기가 넘은 세월이 지났음에도 그 풋바심한 보리밥의 맛과 감촉을 잊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절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랬다. 보리밥 한 사발이 무엇보다 절실했던 때의 그 소박하고 왕성한 식욕은 왜곡되고 변질되지 않은 원초적 건강성이었다.

겨울 보리밭 앞에서 왜 문득 그런 생각이 들까. 고려 말 문익점이 중국에서 목화씨를 몰래 가져오기 전에는 백성들이 무엇을 입고 겨울을 났을까. 귀족들이야 비단이나 수입품으로 얼마든지 겨울옷을 지어 입었겠지만, 먹고 살기도 힘든 백성들은 목화솜과 무명천도 없이 어떻게 겨울을 났을까. 짐승의 털가죽이라도 구하지를 못하면 삼베옷으로만 겨울을 나지 않았을까. 저 겨울보리처럼 헐벗은 채 막무가내로 겨울을 나다가 숱하게 얼어 죽지는 않았을까.

세계 십위권의 경제대국에다 국민소득 3만 불에 육박하는 대한미국은 이제 헐벗고 굶주림에서 한참을 벗어났다. 영양실조 대신 비만을 걱정하고 먹고 남긴 음식쓰레기가 골목마다 넘쳐나고 못다 입고 버린 옷가지들이 산더미 같은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그래서 잃은 것은 없을까. 자살자가 늘어나고 함부로 남의 목숨도 해치는, 심지어는 제 자식까지도 죽여서 태연히 암매장하는, 이 극에 달한 패륜과 생명경시 풍조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겨울 보리밭 앞에서 오래 발길이 머문다. 얼어붙은 땅에서 가냘픈 잎과 뿌리로 혹한의 계절을 견디는 저 겨울 보리가 보여주는 생명이란 얼마나 경이롭고 엄연한 것인가. 나도 덕지덕지 껴입은 미망과 허위의 옷가지를 벗어버리고 살을 에는 삭풍의 채찍 앞에 서고 싶다.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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