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길 위에서
일본 ③

▲ 오키나와엔 총알로 만든 기념품을 판매하는 가게도 있다. 아마도 `전쟁의 기억`을 잊지 않고 있어서가 아닐까?

열대의 거리를 한가롭게 오가는 사람들, 푸른 하늘을 날아다니며 재잘대는 새들, 한적하고 평화로운 바닷가 풍광만을 보자면 오키나와는 한없이 아름다운 섬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여기에도 비극의 역사는 있었다.

태평양전쟁이 끝나가던 1945년 봄. 일본 최남단 오키나와에선 25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죽었다.

그중 15만 명은 이른바 `천황의 군대(皇軍)`도 아니었고 `대동아공영`과 `빛나는 일본제국 건설`에 관해 아는 바 없던 섬의 무지렁이들이었다. 미국 전투기의 폭격이 이어지던 그 당시. 흉흉한 소문이 떠돌았다.

“상륙한 미군에 잡히면 남자들은 손발이 잘리고 여자들은 윤간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끔찍한 이야기. 패전을 예감하고 있던 일본군은 주민들에게 자폭용 수류탄을 나눠줬다고 한다.

폭격을 피해 산으로 숨어든 오키나와 주민들은 수류탄과 총알이 모자라면 몽둥이와 곡괭이를 이용해 딸과 아내를 죽였다. 자신이 미국 군인에게 살해당한 후 식구가 겪을 모욕을 미리 방지하자는 차원에서였다. 그것은 일종의 `집단광기`에 가까웠다. 전쟁이 부른 아비규환. 그때 오키나와는 지옥이었다.

▲ 전쟁의 공포와 비극을 체험할 수 있는 `네이비 언더그라운드 파크`.
▲ 전쟁의 공포와 비극을 체험할 수 있는 `네이비 언더그라운드 파크`.

그런데 한 가지 이해 못할 것은 당시 섬에 주둔한 일본군의 태도다.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며 중국, 한국, 심지어 저 멀리 미얀마와 인도네시아에서까지 양민들을 개나 돼지처럼 도륙한 일왕 히로히토 휘하 군인들 말이다. 오키나와가 점령되고 3주 후쯤 미군 사령부는 수 km에 이르는 비밀 지하기지를 발견한다.

아…, 거기에 찾은 건 일본군 4000여 명의 시체였다. 장교들은 할복(割腹) 했고 사병들은 서로의 머리에 총을 쏘았다. 섭씨 30도가 넘는 무더위. 수천 구의 시체가 동굴 속에서 썩어가는 냄새를 상상하면 지금도 끔찍하다. 집단자살이었다. 자신들의 왕을 위해 자랑스럽고 명예롭게 목숨을 끊자는 이른바 `옥쇄(玉碎)`였단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날. 기자는 우리의 역사를 떠올렸다. 그 옛날 계백이 이끌던 백제의 5천 결사대는 5만 명 당나라·신라 연합군에 대항해 마지막 한 사람까지 힘을 다해 싸우다 죽는다. 전쟁에 임하는 군인의 태도는 이러해야 하지 않을까?

백제 결사대를 대입해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스스로 죽을 용기`를 가진 일본군 4천 명이면 미군 4만 명과 맞붙었을 것인데. 되짚어 생각해봐도 이른바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이 도대체 뭔지를 고민하게 된다.

어쨌건 그 `역사적 비극의 현장`은 현재 `네이비 언더그라운드 파크(Navy Underground Park)`로 이름 붙여져 관광객을 받고 있다. 전시된 죽음이라니…. 이것 또한 아이러닉하다.

▲ 오키나와 거리 곳곳에는 맛깔스럽고 저렴한 음식을 파는 노점이 흔하다.
▲ 오키나와 거리 곳곳에는 맛깔스럽고 저렴한 음식을 파는 노점이 흔하다.

▲ 오키나와의 꽃과 사람들

유쾌하지 않은 말이 길어졌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오키나와는 위에 서술된 것과 같은 `비극`보다는 `즐거움`과 `따스함`이 더 많이 발견되는 여행지다.

“실례합니다”와 “고맙습니다”란 말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반복하는 오키나와 사람들. 그들의 친절과 웃음은 낯선 곳을 찾은 관광객을 안심시키기에 충분하다.

나하시(市) 중심가인 국제거리. 그곳 골목에서 작은 술집을 운영하는 동갑내기 사내를 만났다. 오리온 맥주를 사이에 두고 더듬더듬 영어로 나눈 이야기는 흥미로웠고, 그의 고향 사랑은 유별나다 싶을 정도라 부럽기까지 했다.

프랑스의 시인 빅토르 위고(Victor Hugo)는 “전 세계를 타향으로 느끼는 이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성숙한 인간”이라 말했지만, 그건 위대한 작가에게나 어울릴 법한 이야기고 보통 사람들에게 고향이란 돌아가 쉴 수 있는 모성의 품 같은 곳이 아닌가.

오키나와를 떠나오던 날 예상치 않게 들른 미에바시역(驛) 근처 선술집의 주인아주머니도 기억난다. “당신, 장개석(蔣介石)과 닮았다”는 황당한 이야기로 기자를 당황하게 했던.

동유럽을 여행할 때 김정일과 반기문을 닮았다는 말을 듣긴 했다. 백인들은 동양인의 얼굴 특성을 정확히 구분해내지 못하니 이해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뜬금없이 타이완 총통을 닮았다니….

어쨌건 그 술집에서 맛본 선어회는 정말이지 최고였다. 아주머니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부적(符籍)까지 선물했다.

이들만이 아니다. 해변에서 만난 안전요원과 길을 물었을 때 친절하게 안내해준 백화점 점원과 여대생, 전통축제를 즐기던 노인, 거기에 말도 통하지 않는 기자를 앉히고 정성스레 이발을 해준 미용실의 헤어 디자이너까지 오키나와에서 만난 이들은 그곳 날씨처럼 따스한 가슴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한국과는 기후가 판이했기에 오키나와엔 처음 보는 꽃들도 많았다. 그것들 하나하나가 모두 아름다웠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열대의 꽃을 닮았다. 친절과 상냥함의 정점. 만약 기자가 아직도 오키나와를 그리워하고 있다면 그건 거기서 만난 사람과 꽃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 “당신은 장개석과 닮았다”란 말로 기자를 놀라게 한 오키나와 술집 주인 내외.
▲ “당신은 장개석과 닮았다”란 말로 기자를 놀라게 한 오키나와 술집 주인 내외.

▲ 그리고, 남은 이야기 몇 가지

오키나와의 바다와 술, 음식과 사람, 꽃 이야기를 하느라 빠뜨린 것이 적지 않다.

길거리의 별미 타코야키(문어풀빵), 국제거리를 산책하다 만난 전위적인(?) 패션의 학생과 꼬마들, 오키나와 주민들의 `식량·부식창고`라고 불릴만한 마키시 시장의 터줏대감 할머니들.

3박4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오키나와 여행은 작지 않은 즐거움을 준 것이 분명하다. 다녀온 이후 오키나와를 공간적 배경으로 하는 영화 `행복을 기다리며`와 `눈물이 주룩주룩`까지 찾아봤을 정도니까.

다시 찾아온 혹한이 몸과 마음을 움츠리게 하는 요즈음. `일본의 열대천국` 오키나와가 그립다.
 

▲ 고명으로 얹은 돼지고기가 맛있는 오키나와 소바.
▲ 고명으로 얹은 돼지고기가 맛있는 오키나와 소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난 진미(眞味)

“당신이 먹는 음식을 알려주면,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줄 수 있다”라고 말한 게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였던가. 각각의 사람이 즐기는 요리는 개인의 취향을 반영하는 동시에 그 사람의 계급까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집에 머무를 때나 여행을 떠나 길 위에 있을 때나 마찬가지다. 누구나 자신의 좋아하고 즐기는 음식을 찾게 되는 게 인지상정.

하지만, 개인의 취향과는 무관하게 꼭 찾게 되는 요리도 있다. 이탈리아에 가서 피자를 먹지 않는다거나, 동남아시아 여행에서 싱싱한 가재와 새우를 멀리한다면 그건 서글픈 일이 아닐까.

남국의 정열이 가득한 오키나와 역시 `빼놓지 않고 맛봐야 할 것들`이 있다.

관광객으로 북적거리는 국제거리를 걷다가, 혹은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호젓한 동네를 헤매다가 들른 식당에서 혀끝을 자극하는 맛있는 선어회(鮮魚膾)와 따끈한 국물이 “바로 이 맛이야!”라는 감탄사를 부르는 면(麵) 요리와 조우하는 것은 여행자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이다.
 

▲ 일본 소주 한잔을 곁들이면 선술집 싸구려 초밥도 맛있다.
▲ 일본 소주 한잔을 곁들이면 선술집 싸구려 초밥도 맛있다.

◆ 숙성된 다랑어의 감칠맛… 국제거리 선술집

참치는 이제 한국에서 대중화된 생선이다. 1980~90년대엔 조그만 캔에 담긴 통조림으로 맛보던 것을 이제는 일정한 값을 치르면 무한으로 제공받을 수 있다. 남태평양이나 일본 근해에서 잡힌 참치를 안주로 판매하는 술집은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다.

참치의 다른 이름인 다랑어는 해동과 숙성 과정에서 맛이 판가름 난다. 식당 주인의 축적된 노하우와 실력이 중요한 생선이다. 그래서 참치 맛을 좀 안다는 사람은 늘 다니는 참치 요릿집 외에는 발걸음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오키나와에 도착한 이튿날. 한적한 골목을 걷다가 지긋한 중년의 사내들이 모여 앉은 걸 보고는 망설이지 않고 조그만 선술집에 들어갔다. 현지인들이 많다면 그 가게는 `지역 맛집`일 가능성이 높은 법. 기자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고, 주문한 다랑어회는 실망을 시키지 않았다.

한 사람이 먹기에 많지도 적지도 않은 적당한 양을 담은 접시. 어떤 방식으로 숙성을 한 것인지 껍질은 쫄깃했고 뱃살은 부드러웠으며 등살은 담백했다. 함께 들이켠 일본 청주가 달았다. 그래서 어떻게 했냐고? 다른 손님들이 보건 말건 연거푸 세 접시를 먹었다.
 

▲ 오키나와 국제거리 인근 선술집에서 맛본 다랑어회.
▲ 오키나와 국제거리 인근 선술집에서 맛본 다랑어회.

◆ 아이스크림처럼 녹는 돼지고기… 독특한 국수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따끈한 국물을 싫어할 리 없다. 기자 역시 그런 모주꾼 중 하나다. 여행지에서는 가벼워진 마음과 홀가분함으로 인해 과음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런 날이면 자연스레 국물을 찾게 된다.

별 기대 없이 불쑥 찾은 숙소 인근 국수집. 어떤 향신료를 넣어서 얼마나 삶았는지 입에 넣자마자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버리는 돼지고기 고명의 국수가 기가 막혔다.

국물 맛은 당연히 좋았고 면발 또한 쫄깃하고 탱글탱글. 이름이 궁금했다. 식당 주인이 “오키나와 소바”라고 웃으며 알려줬다. 요즘도 숙취에 시달리는 아침이면 이 국수가 한없이 그립다.

글/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제공/조경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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