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민호의 살며 생각하며⑵
영화 `1987`과 그 날의 기억

서울 용산역에 큰 쇼핑몰이 있다. 거기 영화관도 있는데 프랜차이즈 극장 중 하나다. 낮 열두시가 채 못된 시간,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이미 흥행이 고비를 훨씬 지나 저점으로 내려간 때다.

1987년이라면 대학 4학년 때다. `1987`영화를 보러가는 것은 그때의 기억으로 되돌아감을 뜻한다. 많은 사람들이 보았고 영화평도 나쁘지 않은데 참 오래 망설였다. 돌아보고 싶지 않은 마음도 컸고, 그보다 영화가 내 자신의 기억을 해칠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었다.

기록이나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되 허구적 요소를 함께 가진 영화는 늘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해할 수 있다. 영화는 관객을 앉혀 놓아야 한다. 그러려면 스토리 라인이 재밌어야 한다. 역사적 사건은 영화적 스토리를 위해 발생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적당한 가공이 필요할 것이다.

`1987`은 젊은 두 죽음이 혁명의 동력이 된 것처럼 묘사하고 있었다. 박종철과 이한열. 내가 아는 한 이한열의 죽음은 6월 10일의 대규모 시위를 직접 자극한 것은 아니었다. 박종철 고문 치사가 축소 은폐되었음이 드러나고 천주교 정의 구현 사제단이 날짜를 `고시`하자 정국은 삼엄하다 못해 꽁꽁 얼어붙었다. 1987년 6월 10일은 빙판 위에 불이 붙을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나는 이한열의 죽음과 수많은 군중이 운집했던 장례식을 똑똑히 기억한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7월의 일이었다. 그의 죽음이 6월 10일을 촉발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영화 속 스토리와는 달리. 물론, 이한열이 부상을 당한 시점이 6월 10일 혁명의 직접적 자극제가 되지는 못했다는 나의 판단은 다시 검토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보다 더 민감한 문제는 역사를 움직이는 실체는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실존인물 최환 검사, 부검의 황적준 박사, 영등포 교도소의 한재동 교도관 같은, 충분히 알려지지 않은 개인들의 숨은 역할이 민주항쟁을 가능케 했다는 논리를 `1987`은 보여준다. 이는 당시 학생운동을 지배하고 있던 민중사관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1987`은 민중사관을 비판하는 대신 개인들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이 개인들은 집합적 개념에서 보면 노동자도, 농민도, 학생도 아니다.

물론 그날의 함성 이면에는 군부와 그와 결탁된 독점 자본에 `짓눌려 있던` 민중들, 지식 집단의 고통과 저항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원혼이 된 박종철 군을 위해 부검을 하도록 하고 용기 있게 사실을 사실대로 적어 넣고 이를 세상에 알려 시위를 끌어낸 개인들이 없었다면 6월 10일의 혁명은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때 나는 국문과의 과대표, 박종철 군은 언어학과의 과대표였다. 인문대학 각 과의 과대표들은 자주 그의 하숙집에 모여 숙의를 하고 유인물을 나누었다. 그는 그 모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지만 그가 `민민투`의 정식 조직원은 아니었을 것이다.

삶도, 역사도, 많은 것이 우연에 부쳐진다. 종철 군은 불행히 안타까운 죽음을 맞고 나는 아직 살아 있다. 그러나 나 또한 죽어 그를 만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삼가 박종철 군의 명복을 빈다.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이철진 <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