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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도(콩트)

등록일 2018-02-13   게재일 2018-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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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삽화=한국화가 권청찬
 

양양이 부디 오늘 이 깊은 밤의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 나가기를,

그리하여 이번 설에는 부디 고향에 돌아갈 수 있기를.

빛나는 황금모텔 현관을 지나치며 나는 양양의 무사귀환을

마음 속으로 축원해 주었다.

잠깐 뒤돌아 하늘을 올려다 보니, 섣달 그믐 가까운 가느다란 달이

구름 바깥으로 창백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배는 황혼녘에 가까워서야 흑산도 부두에 가닿았다. 어느덧 해가 방파제 너머 바다 산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ㅡ진짜 섬이 까맣네.

ㅡ해질 무렵이라 어두워 보여서 그럴 거야.

ㅡ홍도보담 확실히 크네.

어젯밤에 우리는 저쪽 홍도에 있었다.

날이 흐려 방파제 비닐막까지 걸어가는데 사방이 별 한 점 없이 캄캄했다. 맵찬 밤바람에 귀가 당장 떨어져나갈 것 같았다. 플래시를 켜고 보이는 데만 짚으며 저쪽에 보이는 포장마차 램프 불빛만 겨냥해서 걸음을 옮겼다. 바다가 방파제에 제 피부를 긁혀대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

ㅡ아주머니, 우리 쏘주하고, 뭐가 좋을까요?

이마에 주름 깊은 아주머니가 군소가 좋겠다고 했다. 군소는 바다달팽이라고도 한다. 이 나라 어느 바다 속에나 산다지만 나는 홍도에서만 군소를 먹어 봤다.

ㅡ캬. 쏘주 안주로 안성맞춤이다.

흥수는 술만 있으면 무엇을 곁들여도 좋은 친구였다.

ㅡ쌉싸름하네.

군소를 생전 처음 먹어본다는 찬은 신기할 따름인 모양이었다.

군소는 연체동물이다. 단단한 껍질도 없이 춥고 어두운 바다 밑을 기어다닌다. 두 쌍의 더듬이가 있어 한 쌍은 촉감을 느끼고 또 한 쌍은 냄새를 맡는다. 먹물을 뿌려놓은 듯 캄캄한 바다 밑을 두 쌍 더듬이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군소를 나는 닮았다고 생각한다.

ㅡ형이 언제 여기 왔었다구?

찬이 내 빈 잔에 소주를 한가득 넘칠 듯 따랐다.

ㅡ오래 됐어.

그건 마리가 내 곁을 떠날 때쯤이었다. 의미 없이 입에 풀칠만 하며 살기는 싫었다. 그때까지 내가 이렇다할 일을 찾지 못한 이유였다. 그리고 그것이 마리가 내 곁을 떠나겠다고 선언한 명분이었다.

ㅡ당신은 고양이 한 마리도 못 키울 인간이야.

마리는 나처럼 게으르고 이기적인 사람을 본 적이 없다 했다. 그렇게 마리는 떠났다. 마리가 여행용 캐리어 가방을 끌고 나가버린 후 나는 평소 단골로 다니는 카페 여주인에게 부탁해서 고양이 한 마리를 얻어왔다. 언젠가 마리가 돌아오면 내가 고양이쯤은 기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입증해 보일 작정이었다.

잿빛 새끼 고양이는 처음부터 내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나도 산 짐승이 옆에서 왔다갔다 하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사월에 얻어왔다 해서 사월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고양이는 손이 많이 가는 짐승이다. 때마다 몇 번씩 예방 접종을 시켜 줘야 했다. 한밤에 맥없이 목을 늘어뜨려 24시 동물병원을 찾아간 것도 여러번이었다. 하루하루가 고양이를 내 곁에 두기 위한 싸움의 연속이었다. 하루에 한 번은 먹이를 주고 물을 갈아줘야 했다. 먼데까지 촬영 일을 나갔다가도 반드시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나중에 비록 계약직이지만 제한 없이 재계약을 할 수 있는 직책이 떨어졌지만 집 떠난 마리는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여름, 가을, 겨울이 가자 나는 참을 수 없이 외로워졌다. 사월이를 시골 계신 어머니에게 보내 버렸다. 나보다는 늘 집에 계신 어머니가 사월이의 정신 건강에도 좋을 것이었다.

나와 흥수, 찬은 디카사진 전람회 입선 동기로 몇 년 전에 만났고, 각자가 속한 곳보다 셋의 술자리가 더 없이 편했다. 적어도 나는 그러했다.

파닥, 파닥, 파닥….

방파제 매운 바람에 포장마차 사방 벽이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했다. 방파제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절박하게 부서졌다.

목포에서 한참을 먼 바다로 나와야 하는 서쪽 끝 작은 섬 홍도다. 파도 소리만 들으면 금세라도 바다가 이 섬을 집어삼키고 말 것 같다.

셋이서 소주를 여섯 병이나 비우고 방파제 포장마차를 나온 것은 얼추 새벽 두 시나 되어서였다. 나는 도무지 술이 취하지 않았다. 안동이 고향인 흥수는 안동역에선가 하는 노래 곡조를 낮게 흥얼거렸다. 말수 적은 찬은 찬대로 다리가 휘청거렸다. 나는 정신이 은화처럼 짤랑거렸다.

한 발만 크게 방파제 바깥으로 내딛으면 저 세상 사람이다. 그래도 아직은 나는 이 세계 쪽에 속해 있다. 나는 더 찍어두고 싶은 이승의 풍경들이 있었다.



흑산항 선착장에 발을 내딛고 나자 우리 셋은 다시 힘이 솟았다. 밤이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어디를 향한다 할 것도 없이 해안선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수협에, 식당들에, 약국에, 마트까지, 선창가는 몇 년 전에 비해서도 꽤나 번화해졌다.

ㅡ형. 어디 정해둔 데 있어요?

ㅡ그런 데가 있을라구.

나는 두 사람을 황금모텔로 데려갈 작정이었다. 오래된 여관치고는 깔끔한 것을 지난 번 경험으로 알았다. 하지만 어느 쪽 골목인지 불분명하다. 내가 잠시 헤매는 눈치를 보일 때쯤 흥수가 골목 안쪽에 있는 다방 하나를 가리켰다.

ㅡ저기서 쌍화차라도 한 잔 하면서 잠깐 쉬어갑시다.

ㅡ그것도 좋겠네요.

흥수와 찬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킬킬거렸다. 하기는 우선 뭔가 뜨거운 것으로 어제 시달린 속을 달래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남자들은 시골다방에 대한 로망 같은 것이 있다. 면 단위 소재지 같은 곳에는 늘 다방이 한두 개쯤은 있게 마련이고, 그런 곳에는 늘 티켓을 끊어 연애를 할 수 있는 여자들이 있다.

나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간판에 부산다방이라고 써 있다.

ㅡ마담이 부산 여잔가?

흥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에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방 문을 밀고 들어갔다.

ㅡ어서 오세요.

홀 쪽에서 굵직한 여자 목소리가 났다. 부산 사투리와는 전혀 거리가 먼 서울말이다. 장사를 하러 서울서 내려온 나이든 여자일 것이다.

다방 안은 꽤 널찍했다. 우리는 난로 옆 소파에 다들 털썩 몸을 기댔다. 저쪽 끄트머리 탁자에 웬 남자 손님 하나가 젊은 여자와 어깨를 맞대고 나란히 앉아 있다. 우리가 앉고 나자 여자가 일어났다. 이런 데 여자답지 않게 몸매가 날씬하다. 홀쪽으로 갔던 여자가 메뉴판을 들고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ㅡ뭐 드실까예.

여자의 목소리는 스커트 밑으로 드러난 민출한 두 다리처럼 가늘었다. 흥수가 나를 보고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ㅡ쌍화차 있어요? 네 잔. 날계란 띄워서.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고 씽긋 웃으며 돌아섰다. 잠시 후 여자가 쟁반에 차를 받쳐 들고 우리 쪽으로 왔다.

ㅡ이쪽으로 앉아요.

흥수가 여자를 자기와 나 사이에 앉게 했다. 남자들 사이로 여자가 들어오자 알지 못할 부드러운 기운이 감돌았다. 나는 흘낏 여자를 곁눈질해 보았다. 여자는 얼굴이 하얀데다 턱이 뾰족한 것이 몹시 팔초해 보였다. 어딘지 모르게 순진해 보이면서도 피곤함이 묻어 있다.

여자는 우리 앞에 조심스럽게 쌍화차를 내려놓고 자기 앞에도 한 잔을 놓고 잠시 말없이 앉았다.

ㅡ여행들 오셨어요?

여자가 찬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우리 중에는 확실히 찬이 젊었다. 찬이 갑자기 수줍은 사내가 되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ㅡ말투가 이쪽 동네 사람 같지는 않은데.

흥수가 장난기 어린 눈으로 여자를 짯짯이 뜯어보는 시늉을 한다. 여자는 잠깐 주저하는 듯했다.

ㅡ포항이예요.

ㅡ포항이면 먼데? 이름은요?

ㅡ양양이예요. 양가예요.

ㅡ양양? 재밌다.

흥수가 고향 사람이라도 만난 것처럼 반가워했다. 서울말을 쓰려는 여자의 말씨에는 확실히 그쪽 억양이 배어 있다.

ㅡ언제 이곳으로 왔어요?

한약재를 뭉근히 끓여내는 쌍화차에는 썬 대추며 잣이며 뭔가 둥둥 떠 있는 것들이 많다.

ㅡ이 년 됐나. 서울 있다가 전주에도 있었고예.

여자는 체념한 듯 거쳐 온 곳들의 이름을 짚었다. 나이가 서른이 채 안되어 보였다. 너무 이르게 너무 먼 곳까지 다다른 셈이었다. 뭍의 여자에게 이곳은 세상의 끝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ㅡ곧 설인데.

설이 멀지 않았다. 흥수는 여자에게 뭔가 더 이야기를 하려다 말고 내 쪽을 향했다.

ㅡ형수는 소식 있어요?

ㅡ형수라니. 결혼한 것도 아니고 몇 년 함께 지낸 것뿐인데.

나는 울상을 지으며 곧이곧대로 털어 놓았다.

ㅡ그래도 짐은 다 안 싸갖고 나가셨다며.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스푼으로 쌍화차를 훌훌 저어댔다. 구석에 앉은 사내가 담배를 태우는지 냄새가 건너왔다. 나는 서른일곱에 폐렴을 심하게 앓으면서 담배를 겨우 끊었다.

ㅡ글구, 찬이 넌 캄보디아 여자랑 결혼할 생각이라며.

ㅡ에이, 결혼은 무슨. 그냥 만나는 거지.

ㅡ나는 이 나이 될 때까지 여자라고는 손목도 못 잡아 봤는데.

흥수가 너스레를 떤다. 보험 외판원이라는 게 쉬운 직업인 것만은 아니다. 여자는 슬쩍 포개어 오는 흥수의 손길을 가만히 뿌리친다. 흥수는 슬쩍 여자의 눈치를 보며,

ㅡ설에 고향에는 안 가요?

하고 물었다.

ㅡ이번에는 가보려고요. 지진 때문에. 여기서도 며칠 전에 땅이 흔들렸어요.

ㅡ지진? 여긴 서쪽인데?

ㅡ두 번이나 연달아서. 포항만큼 크지는 않았지만요. 고향 집들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대피소 들어가 있다는 얘기를 여기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는 없네요.

ㅡ고향에는 누가 계신가요?

ㅡ아버지하고 오빠 부부가 살아요.

여자의 얼굴에 그리움과 저어함이 함께 그려졌다.

그때다. 저쪽 구석에서 이를 앙다물고 내뱉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ㅡ야. 재 떨어진다.

우리는 순간 움찔했다. 그건 분명 우리를 향한 경고 메시지와도 같았다. 어디서 온 것들인데 여기 여자를 붙들고 수작이냐는 뜻일 것이다.

우리는 서로 마주보고 소리 없이 웃었다. 이제 일어날 때가 된 것이다. 여자가 일어나 남자 쪽으로 건너간 뒤 우리도 셈을 치르고 다방을 나왔다. 바깥은 벌써 땅거미가 졌다. 시간을 너무 오래 지체한 것이다.



우리는 황금모텔 이층 여관방에 들어 배낭을 베개 삼아 누웠다. 이제부터 뭘 해야 할지 궁리해 보려는 것이다.

ㅡ흑산도에 왔으니 홍어는 먹어 주어야겠죠?

ㅡ좋지. 그런데 여기 사람들은 삭힌 걸 잘 안 먹어.

ㅡ정말인가요?

진천이 고향인 찬은 바다 음식을 즐기지 않았다. 생물 홍어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다.

ㅡ그래도 홍어 하면 삭힌 게 안 낫겠어요?

흥수는 언젠가 서울에서 맛본 백령도 홍어 맛을 못 잊어 했다.

ㅡ좋도록 하자구.

나는 두 사람을 끌고 모텔에서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홍탁집으로 데려갔다. 나 말고도 다른 일행이 있다는 것만 다를 뿐 모든 것이 몇 년 전 그대로다.

흑산도 홍어맛집이라는 간판이 붙은 집 주인 할아버지도 그날 그대로다. 나이든 사람의 노쇠는 잘 드러나지 않는 법일까. 표나지 않는 사이에 사람은 늙고 병이 든다. 나도 그렇게 자연을 따라 살다 피할 수 없는 때가 닥치면 스스로 죽고 싶다.

우리는 탁자 몇 개 없는 좁은 홍탁집을 독차지하듯 했다. 왼쪽 발을 끄는 이 노인은 들은 대로라면 왕년에 목포에서 힘깨나 쓴 전력을 가지고 있다. 한 쪽 다리를 제대로 못쓰게 된 것도 경쟁 관계에 있던 파벌에게 칼침을 맞은 때문이라고 했다.

제대로 삭힌 홍어는 홍어전을 부치든 홍어애탕을 끓이든 강력한 암모니아 향에 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충격을 받게 마련이다. 그 독한 냄새와 맛에 아예 접근 자체를 꺼리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일단 한번 맛을 들이면 좀처럼 헤어날 수 없는 것도 바로 이 삭힌 홍어의 독한 맛이다.



서울에서 나는 삭힌 홍어를 파는 곳을 두 군데 알았다. 둘 다 양재동 쪽에 있어 한곳은 백령도 홍어를 팔았다. 수원 사는 흥수를 데려간 곳이다. 다른 한 곳은 칠레에서 수입한 홍어를 직접 삭혀 파는 곳이다. 먼저 안 곳은 칠레산 홍어 쪽이다. 갓 부쳐 낸 홍어전 뜨거운 맛이 일품이다. 백령도 홍어는 진하디 진한 홍어애탕 쪽이다. 그렇게 거품 일고 냄새 진동하는 걸 어떻게 먹나 하다가도 일단 한술 뜨기 시작하면 속이 뻥 뚫릴 때까지 자꾸 숟가락질을 하게 된다.

ㅡ시원하네.

ㅡ좋네요, 정말.

흥수도, 찬도 만족스러운 표정이다. 흑산도 막걸리도 생각보다는 달지 않아 마음에 들었다. 막걸리는 역시 쉰 맛이 제격이다.



바깥으로 나오자 세상은 이미 한밤중이다. 우리는 그대로 황금모텔로 들어가기 싫다. 해안부두를 따라가는 우리 걸음은 자연히 방파제 쪽을 향한다. 바다를 향해 유난히 길게 뻗어나간 방파제는 적요하다. 가끔 바다를 향해 앉아있는 낚시꾼 같은 이들이 보인다.

우리가 방파제 끄트머리에 다가갔을 때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투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시야에 들어온 사람 그림자가 둘이다. 남자와 여자. 남자는 누군지 잘 알 수 없는데, 가느다란 다리는 분명 아까 부산다방에서 만났던 양양이다.

남자는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것도 같고 여자를 질책하고 있는 것도 같다. 흥수가 성이 난듯 그들을 향해 다가가려는 것을 나는 옷깃을 잡아당겼다. 세상 모든 일에 참견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양양을 방파제 끝에 남겨두고 돌아서면서 나는 무슨 죄를 지은 것 같다. 왜 방파제에 가로등을 켜놓지 않았을까. 오늘따라 전기가 나가버린 걸까. 어둠 바깥으로 언뜻 드러난 남자의 화난 얼굴은 금방이라도 무슨 일을 저지를 것만 같았다.

우리는 천천히, 그리고 말없이 방파제를 거꾸로 걷는다. 양양도, 우리 셋도 모두 세상 끄트머리에 와 있는 것 같다. 곧 실없는 희롱에 손을 내주는 사람도, 희롱하는 사람도 모두 사라질 것이다. 어둡고 차갑고 지진이 자주 오는 세상에서, 세상의 잉여물이 되지 않으려고 애쓰며 버티다 끝내 스러지고 말겠지.

흥수도, 찬도 마음이 어두워진 모양이다. 우리는 방파제에서 부두로 이어진 곳에 이르러 난간에 걸터 앉았다. 흐린 밤하늘이다. 방파제 쪽 사람 그림자는 이미 보이지 않고 검은 바다와 바다 너머 산이 짙은 그림자처럼 밤하늘과 맞닿아 있다.

나는 차마 더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더 먼 옛날 일을 떠올린다. 너무 찬란한 빛은 마주 대하기 어려운 법이니까. 마리 같은 여자애가 내곁에 생겨나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까마득한 때가 있었다. 어렸고 카메라 한 대만 있으면 세상 전부를 끌어 안을 수도 있을 것 같았던 시절, 그때 나는 목포에서 홍도로 갔다 예기치 않게 흑산도에 들렀다. 값싼 화물배는 오후에 홍도 선착장을 떠나 해가 저물 무렵에야 흑산항에 와 닿았다. 그 뒤로 흑산항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몇년 전의 흑산항만을 떠올릴 뿐이다.

흑산항 선착장에서 방파제까지 그때는 술집 작부들이 유리 미닫이문 바깥에 나와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불러댔다. 짓궂은 어느 여자는 이쪽을 향해 치마를 들춰보이기까지 했다. 밖으로 드러난 붉은 빛 팬티는 내게 삶의 열락도, 수치스러움도 모두 뜻하는 것처럼 보였다.

세월이 오래 흘렀다. 너무 깊은 어둠 속에 묻힌 내 더듬이는 방향도 냄새도 맡지 못할 지경이다. 무엇을 찾아 헤매 다녔는지조차 기억할 수 없다.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수많은 사진들 속에 정작 내가 찾고 있던 것은 없다.

ㅡ일어나죠, 형. 떠난 여자 생각하면 뭐해. 그러게 있을 때 잘해 주쟎고.

  ▲ 방민호<br /><br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흥수가 가벼운 핀잔으로 내 깊은 외로움을 깨뜨려 주었다.

ㅡ가자. 황금모텔로. 소주병에 빨대라도 꽂고 누워서 한 잔 더하든지.

ㅡ그거 재밌겠는데요?

농사 짓느라 여태 결혼을 못한 찬은 겨울이 심심해서 못견디는 친구다.

ㅡ에이, 저 양양하고 같이 마시면 얼마나 좋아.

ㅡ그러게 말이다.

우리는 어딘지 모르게 안쓰럽고 정이 가는 양양에 대한 미련을 끝내 떨쳐버리지 못한다.

양양이 부디 오늘 이 깊은 밤의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 나가기를, 그리하여 이번 설에는 부디 고향에 돌아갈 수 있기를. 빛나는 황금모텔 현관을 지나치며 나는 양양의 무사귀환을 마음 속으로 축원해 주었다.

잠깐 뒤돌아 하늘을 올려다 보니, 섣달 그믐 가까운 가느다란 달이 구름 바깥으로 창백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끝>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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