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형<br /><br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
▲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

박자 감각이 절대적으로 떨어지는 필자이지만 그래도 2월이면 간혹 흥얼거리는 노래가 있다. “빛나는 졸업장을 받은 언니께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 (중략)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중략)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우리나라 짊어지고 나갈 우리들 ….”

아마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을 거라 생각한다. 바로 졸업 노래다. 이 노래 가사 중 필자는 “부지런히 더 배우고 얼른 자라서 새 나라의 새 일꾼이 되겠습니다”라는 부분을 특히 좋아한다. 많은 것을 잊거나 잃어버리고 살지만, 이 부분을 부르며 혼자 코끝을 찡해하던 초등학교 졸업식 모습을 필자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 때 감정을 온전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어린 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사의 의미가 정말 크게 다가 왔었다. 어쩌면 그 때의 추억으로 지금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 모습들이 지금은 영화 속에나 나옴직한 장면이 돼버렸다.

감동을 죽이는 사회여서 그런지 지금의 졸업식에서는 감동을 전혀 찾을 수 없다. 감동은 고사하고 사람들의 눈살만 찌푸리게 만드는 졸업식은 졸업생들은 물론 학부모, 교사들에게도 형식적인 행사가 돼버렸다. 노래의 가사에 나오는 빛나는 졸업장이 사라진 현대판 졸업식, 참 씁쓸하다.

졸업의 의미가 사라지면서 학교의 의미도 사라지기 시작했다면 너무 과할까. 그런데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결코 과하지 않다. 왜냐하면 졸업식이 의미를 잃는다는 것은 곧 졸업의 가장 큰 의미인 감사함과 희망이 학교에서 사라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졸업을 하면서 교사와 학교에 감사함을 느끼는 학생과 학부모가 과연 얼마나 될까? 자신이 가르친 학생들이 졸업한다고 아쉬워하는 교사는 또 얼마나 될까? 감사와 희망의 마음은 감동을 낳고, 그 감동은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눈물로 전달이 되어 모두를 숙연하게 만들었던 졸업식. 그런 졸업식이 있던 시절의 학교는 참 따뜻했다. 그런데 지금은?

필자는 지난 주 포항에 있는 한 중학교 졸업식에 다녀왔다. 어수선한 분위기가 마치 위쪽에서 내려 온 사람들에게 주인 자리를 빼앗겨버린 동계 올림픽 같았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전교생이 참석한 졸업식은 보기 어렵게 됐다. 도시의 큰 학교일수록 그런 현상은 더 하다. 필자가 참석한 졸업식 또한 마찬가지였다. 졸업식 장에서 재학생들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졸업생들의 모습에서 서운함이나 아쉬움, 감사함 같은 것은 더 찾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교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식이 진행되는 도중에 같은 학교 교사로 보이는 사람들이 손님처럼 어슬렁거리면서 가장자리에서 졸업식을 구경하였다. 그리고 말하였다. “어휴, 애들은 빨리 집에 보내는 게 상책이야” 구경꾼이 된 교사들 입에서 나온 말이라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같은 교사라는 것이 부끄러웠다.

산자연중학교에도 지난 주 졸업식이 있었다. 물론 전교생이 다 참석한 졸업식이었다. 식순 중 졸업생이 부모님에게 감사장을 전달하는 순수가 있었다. 감사장은 학생이 직접 작성하고, 또 직접 낭독하고, 그리고 부모님께 직접 전달했다. 학생들은 감사장의 첫 글자를 읽기도 전에 목이 잠겼다. 감사장을 낭독하는 내내 학생과 부모님의 눈에는 진주보다 더 영롱한 눈물이 흘렀다.

삭막해져만 가는 졸업식이 졸업의 참 의미를 되찾는 진주 졸업식으로 바뀌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한 학생의 감사장을 소개한다.

“어머니께서는 제가 힘들 때마다 저를 위해 밤을 새우시고 저의 옆을 지켜주셨습니다. 항상 저를 위해 모든 걸 포기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어머니, 너무나 죄송합니다. 그리고 저의 어머니가 되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더 열심히 공부하고 제가 가진 것에 감사하며 잘 살겠습니다. 위 약속을 잊지 않고 지키기 위해 부모님께 이 감사장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