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수정대구가톨릭대 교수·교양교육원
어느 일요일 오후 팔순을 눈앞에 둔 어머니와 함께 TV 프로그램을 하나 보게 되었다. 무료함을 달래려고 무심코 눈길을 주었다가, 뜻밖의 신선한 내용에 마음을 빼앗겨 마지막 멘트가 나올 때까지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같이 삽시다`라는 제목을 단 이 프로그램은 왕년의 유명 탤런트 네 명이 함께 생활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여주었는데, 두 명이 미술관으로 문화생활을 즐기러 떠나면 나머지 두 명은 사주를 풀어보려고 점쟁이를 찾아갈 정도로, 네 명의 출연자는 얼굴 생김새는 물론 성격과 취향도 제각각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꽤나 인기있는 프로그램이었고, 시간이 된다면 다음 이야기도 또 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보는 재미가 있었다.

이 프로그램이 인기를 누리는 이유는 시청자들에게 때로는 눈시울을 붉게 만들고 때로는 입가에 미소를 띠게 하는 잔잔한 감동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 감동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무엇이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풀어주어 무장해제시키고 어린아이같은 평화로운 미소를 짓게 만드는 것일까? 아마도 `다름의 공존`이라는, 약간은 어색하지만 어찌 보면 풍요로운 느낌을 주는 환경설정 때문일 것이다. 각자의 사고방식이 다르고 처한 환경이 다르지만,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상대의 외로움과 아픔에 공감하는 모습을 통해, 서로 단절된 채 경직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리라.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는 다문화라는 단어가 매우 익숙한 것이 되었다. 경북도청에 마련된 `다문화가족지원센터`를 비롯해 각 지자체에서는 다문화를 위한 정책을 펼치고 있다. 각종 대중매체는 물론 교육현장에서도 다문화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필자가 재직 중인 대학교에도 세계 각국에서 공부하러 온 학생들이 눈에 띄는데, 그 중에는 히잡을 쓴 여학생도 있고, 랩 스타일 머리장식을 한 학생도 있다. 국제학생축제가 벌어질 때면, 각국 의상 차림을 한 학생들이 전통 문화와 음식 등을 소개하면서 한바탕 신나는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런데 `다문화 가정`이니 `다문화 교육`이니 하는 말들과 그것을 축으로 벌어지는 사회현상을 가만히 들여다보자면 무언가 석연치 않은 점을 발견하게 된다. 여러 문화가 한데 어우러지기보다는, `다문화`라는 또 다른 카테고리를 설정하고 그 안에 가둬버리는 일종의 편가르기 같은 느낌을 종종 받게 되는 것은 비단 필자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어느 초등학생이 `학교에서 나를 다문화라고 불러요`라며 울먹였다는 기사는 `다문화`라는 단어가 우리 사회에서 차별과 단절의 대체어로 쓰이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다문화`라는 말 자체가 원래 의도와는 달리, `우리와는 다른`, `우리와 구별되는`이라는 의미로 쓰이게 될 때 그것은 공존이 아닌 사회적 차별과 불평등의 원인이 될 것이다. `다문화`가 또 다른 구별짓기는 아닌지 되돌아보아야 하겠다.

프랑스 중남부 내륙지방에 `르 퓌 앙블레`라는 곳이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정도로 중요한 역사적 가치와 뛰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유명한 도시이다.

이 대성당은 프랑스의 어느 건축물과도 다른 독특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프랑스의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에 비잔티움 제국의 프레스코화로 장식하였고, 입구에는 이슬람의 조각과 서체까지 사용하였다. 건축 자재도 다양한 색깔의 돌을 사용하여 화려한 느낌을 준다. 미술사학자 에밀 말은 `유럽 그리스도교 세계의 가장 아름다운 안뜰 중 하나`로 `르 퓌 앙블레`를 칭송한 바, 이질적이고 다양한 요소가 한데 어울려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이 대성당은 나와 다름을 거부하고 단죄하는 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 같이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