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옥 위덕대 교수·자율전공학부

봄꽃이 환하고 눈부시다. 덕분에 겨우내 칙칙하던 산과 들과 길이 화려하다. 그러나 화르륵 피었다가 차례로 후루룩 져버리니 못내 아쉽다. 요즈음은 봄절기가 유난히 짧아 더욱더 그렇다. 아주 오랜 옛날에도 겨울이 풀리자 봄꽃을 기다릴 만큼 애틋했을까. 우리 조상들은 이 계절을 그냥 보내버리지 않았다. 꽃을 즐기는 방법을 제대로 알았다. 눈으로 보고, 향기를 맡고, 시를 지어 찬탄했다. 그리고도 모자라 음식으로 만들어서 먹으며 한몸이 되고자 했다. 술을 빚기도 하고 화전을 지져 먹기도 했다. 화전이란 말 그대로 꽃지짐이다. 이맘 때 한창인 진달래꽃을 꺾어 찹쌀가루를 익반죽해 둥글게 빚어 기름을 두른 팬에 살짝 지진 다음 진달래 꽃잎을 얹어 한 번 더 슬쩍 지져 꿀을 둘러 먹던 음식이다. 집에서 먹는 것보단 산이나 들로 나가 그 자리에서 만들어 먹었다. 이런 자리를 화전놀이라고 하는데 전국 어디서나 남녀를 구분해 동네마다 화전놀이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영남에서는 여성들의 화전놀이에서 가사를 짓는 문학적 풍류가 더 보태졌다. 화전놀이를 하면서 지필묵을 준비해 가자고 가서 현장에서 가사를 짓기도 하고 다녀와서 회고하면서 짓는 가사도 있었다. 그때 지은 가사를 화전가라고 하는데 19세기부터는 경북 여성들의 화전놀이에 빠지지 않는 관습이 됐다. 화전가 창작과 유통의 전통이 200년도 넘은 셈이다. 화전가는 일종의 기행문이라 할 만하다. 화전놀이를 준비하는 과정, 모처럼의 외출을 위해 단장하는 모습, 현장에서의 즐거움, 참석자들의 면면을 묘사하기도 하고 오랜만에 만난 여성들만의 끝없는 수다, 해 저물 무렵 하산해 집으로 돌아오는 아쉬움과 내년 기약 등을 시간 순서에 따라 노래한 것들이 일반적인 가사의 내용이다. 집에서 할 수 없었던 시집살이 이야기도 하고, 남자들의 노름과 다를 바 없는 놀이의 즐거움 등이 가사 곳곳에 스며있다. 이런 내용의 가사가 일반적인데, 오랜 역사만큼이나 파격적이고도 흥미로운 화전가도 많다.

봉화의 어떤 동족부락마을에서 화전놀이를 하고 화전가를 지었다. 화전놀이 후 이 화전가를 동네에서 돌려 보고 있던 중 한 남성이 보게 됐다. 화전가의 내용에 남성의 풍류에 다름이 없다는 화전가의 내용이 이 남성에겐 가소로웠던지 일종의 답가를 지었다. '조화전가', 즉 화전가를 조롱한다는 의미의 가사였다. 이 조화전가가 또다시 동네에 돌았다. 이중실의 부인 안동 권씨가 이에 반해 또 다시 답가를 지었다. '반조화전가'였다. 비록 여자됨이 한탄스럽기는 하지만 남자들도 성인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기나 하면서 여자놀음을 조롱할 시간이 있느냐며 꾸짖는 내용의 통쾌한 가사를 지었던 것이다. 이 두 작품이 모두 영조22년(1746년)에 간행된 ‘잡록’이라는 문헌에 전해온다. 같은 문헌에 또 하나의 가사 '상심화전가'가 전하는데 조화전가를 지은 남자가 늙은 뒤에 지은 것으로 예전의 조화전가를 후회하는 내용이 있어 자못 흥미롭다. 화전가의 경우 이런 화답가 형식의 작품이 매우 많다.

또 하나 흥미로운 화전가가 있다. 경북대 도서관에 보관돼 있는 ‘소백산대관록’이라는 필사본 가사에 전하는 '덴동어미화전가'는 영주 순흥지방의 화전놀이를 소재로 한 노래인데, 덴동어미라는 비극적 여인의 일생을 액자구성으로 만든 서사가사다. 순흥의 한 동네 여성들이 비봉산에 모여 화전놀이를 즐기다가 어떤 청춘과부의 신세한탄을 한다. 이를 들은 덴동어미가 자신의 기구한 팔자를 들려주며 운명대로 살라고 설득하는 내용이다. 화전가의 변형과 파격이 양적 질적으로 괄목상대한 작품이라 할 만하다. 덴동어미의 파란만장한 운명은 현대의 여러 작가들의 눈에도 띄어 소설·뮤지컬로도 제작됐다. 이 봄이 다 가기 전 화전놀이를 한 바탕하면 또 많은 화전가들이 창작될 것이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