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옥위덕대 교수
▲ 이정옥위덕대 교수

어릴 때 자주 아팠다. 초등학교 2학년 땐가, 아파서 한 달 이상이나 결석한 적도 있었다. 병원을 다니고, 약을 먹어도 낫질 않자 급기야는 무당을 불러 굿을 한 기억도 생생하다. 나는 방에 누워서 마당을 내다보고 있었다. 새의 깃을 꽂은 모자를 쓰고, 요란한 옷을 입은 무당은 방울소리가 나는 커다란 칼을 휘두르며 마당을 돌아다녔다. 마당엔 구경꾼이 가득했고, 요란한 북소리와 꽹과리 소리가 쟁쟁했다. 내가 누운 방 쪽에서 무당을 향해 엄마는 뭔가를 계속 중얼거렸고, 연신 허리를 숙이고 머리를 조아리며 손바닥을 부비고 있었다. 한참을 마당을 휘젓던 무당이 내가 누운 방으로 훌쩍 뛰어들어왔다. 그 커다란 칼을 내 눈 앞에서 마구 휘둘렀고, 난 무서움에 눈을 꼭 감고 손으론 이불깃을 꽉 움켜쥐었다. 한참동안 내 온몸을 칼로 훑던 무당은 그 칼을 마당으로 휙 던졌다. 굿의 효험인가, 아님 앞서 병원과 한의원의 약 덕분인가 어쨌든 나는 한 달여쯤 뒤엔 일어나 학교에 다시 갈 수 있었다.

그러고도 해마다 며칠 동안, 혹은 몇 주간을 병으로 결석하였던 나는 학년말에 개근상을 받는 아이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6학년 땐 난생 처음 개근상을 받았다. 졸업식날 6년 개근하는 아이들이 호명될 때마다 한없이 부러웠다. 그나마 1년 개근상을 받은 나는 6년 우등상과 공로상으로 받은 국어사전보다 이 1년 개근상장과 노트 한 권이 더 자랑스러웠다.

그 후 난 매우 튼튼해졌다. 몸도 마음도 건강했고 아팠던 기억이 별로 없다. 결혼 이후 두 아들을 낳고, 몸이 다소 뚱뚱해졌지만 크게 아팠던 기억이 없다. 물론 두어 번의 입원과 수술이 있긴 했지만 그다지 큰 병은 아니었다. 누군가가 남편에게 ‘당신 아내의 무엇이 자랑스러운가’고 물었다. 이에 남편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건강한 아내’라고 말하였을 정도로 잔병치레라곤 없었다. 내심 ‘예쁜 아내’라고 말해 주길 기대한 나는 실망하긴 했지만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난 건강했다. 맞벌이 직장생활도, 사회활동도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할 수 있었던 것은 건강 덕분이었다.

아, 그런데 이젠 아니다 싶다. 몸 이곳저곳에서 신호가 온 것이다. 몇 해 전 왼쪽 어깨가 유난히 뻐근하여 정형외과를 찾은 적이 있다. 사진을 찍고 초음파로 검사를 한 후 의사는 말했다. “58년 썼으면 많이 쓴 거예요. 이 통증은 이젠 나도 쉬고 싶다는 신호거든요. 무리하지 마세요.” 그때부터였다. 가끔 어딘가 조금 탈이 나서 병원엔 가면 의사의 말씀은 “무리하시나요?”

이번에도 그랬다. 늘 목이 뻐근한 것은 나이 탓이겠거니 하고 목근육을 풀어주는 마사지를 하는 정도였는데 어느 날 아침 목을 왼쪽으로 젖혔더니 손끝까지 찌르르 전기가 흐르는 느낌이 매우 기분 나빴다. 오전엔 한의원을 갔다가, 오후엔 다시 정형외과를 찾아 정밀검사를 했다. 다음날엔 신경외과를 또 찾아 확인했다. 목디스크가 확실했다.

“원인이 뭔가요?” “62년을 사용했어요. 통증은 좀 쉬어라는 신호예요. 그리고 무리 좀 하시죠?” “무리가 어떤 거예요?” “아마 일상이 다 무리인가 봐요. 몸을 섬긴다고 생각하세요. 나이가 있잖아요.”

별 다른 처방은 없다. 물리치료를 받고 목을 쭉 빼주는 견인치료라는 것을 받는데 얼마나 오랫동안 이 치료를 받아야 하는지는 잘 모른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아픈 것도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라고 자만했다. 마음이 아프면 몸도 아프지. 할 일이 태산인데 몸 아플 여가가 어디 있느냐며 오만했다.

일체유신조(一切唯身造). 몸이 있어야 마음이 깃든다. 몸이 아프니 마음도 아프다. 몸이 아프니 집도 학교도 다 심드렁해진다. 내 몸을 가장 귀히 섬겨야겠다고 마음 단단히 먹는다. 몸을 보듬고, 몸을 다독여주면서 고맙고 귀히 섬겨야겠다고 단단히 벼른다. 그래야 다시 집안일도 학교일도, 또 사회생활도 씩씩하게 해 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