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선거에 나타난 TK 민심과 정치권 과제

“국민 여러분!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정말 잘못했습니다. 그 어떤 말과 행동으로도 상처나고 성난 국민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잘 압니다. 국민들께서 자유한국당에 등을 돌린 참담한 현실 앞에 처절하게 사죄를 드리며 반성문을 올립니다.”

민주당 후보 14명 광역의원에 당선
지역구 도의원 당선은 23년만에 처음
대구 수성구의회는 민주당 ‘1당’ 부상
한국당 해체 통해 처음부터 다시해야
인적쇄신으로 새로운 인물 영입 필요
구조·체제·관행·관습 모두 바꿔어야

“국민들의 바람은 냉엄한 반성과 뼈를 깎는 혁신과 변화였습니다. 당명을 바꾸고 두 차례의 혁신위원회를 운영했지만, 결과적으로 국민들께 희망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중략) 보수의 가치가 희생과 책임에 있음에도, 소홀히 했습니다. 정부의 경제 민생 실정에 합리적 대안을 내놓지도 못했습니다. 결국 혁신을 위한 처절한 반성도, 뼈를 깎는 변화의 노력도, 새로운 미래도 준비하지 않는 집단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란 말도 부끄럽습니다. 국민 여러분! 다시 태어나겠습니다. 국민께서 주신 마지막 기회로 여기고 초심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민주당의 압승과 자유한국당의 참패로 마무리된 6·13지방선거 직후 자유한국당 국회의원들이 지난 15일 국회 로텐더홀에서 무릎을 꿇고, 내놓은 반성문이다. 6·13지방선거를 통해 본 TK민심은 어디로 어떻게 흐르고 있으며, TK 정치권은 앞으로 어떤 정치적 과제를 풀어나가야 할까.

6·13지방선거에서 ‘보수의 심장’ ‘자유한국당의 텃밭’으로 불렸던 대구·경북지역 민심이 무너졌다는 사실이 자유한국당에 가장 뼈아픈 패배가 됐다. 대구시장과 경북도지사 선거에서는 승리했지만 기초단체장 가운데 박정희 대통령의 고향이자 친박계의 성지로 불리는 구미시장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가 당선되는 이변을 낳았고, 광역의회와 기초의회 선거에서도 민주당 후보들이 대거 당선되는 돌풍을 일으켜 TK 밑바닥 민심이 온통 흔들렸다.

◇ TK 일당독재 바꾼 민주당 바람

6·13지방선거 개표 결과는 자유한국당이 독식해왔던 TK 광역의회와 기초의회에 민주당이 대거 진출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불렀다. 우선 경북도의회에 민주당은 지역구 7명, 비례대표 2명 등 총 9명이 입성했다. 이로써 60명이 정수인 경북도의회가 자유한국당 41명, 더불어민주당 9명, 바른미래당 1명, 무소속 9명으로 재편됐다. 민주당 후보가 경북도의원에 당선된 사실만 해도 지난 1995년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영양군 제1선거구에서 류상기 전 경북도의원이 당선된 이후 23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대구시에서도 30명이 정수인 대구시의회에 비례의원을 포함해 더불어민주당 의원 5명이 당선돼 보수의 장벽을 허물었다. 또 TK지역 기초의원에서 민주당의 약진은 놀라울 정도였다. 대구 기초의원 선거에서는 민주당 공천 기초의원 후보 46명 가운데 단 한명을 제외한 전원이 당선됐다. 특히, 대구 수성구에서는 민주당 소속 구의원이 9명으로, 8명 당선에 그친 한국당을 제치고 구의회 1당이 되면서 의장직까지 챙겼다. 중구도 3명이 당선돼 자유한국당과 의석 수가 같았다.

특히 자유한국당과 더불어민주당의 대구지역 전체 기초의회 의석 수 차이가 8석에 불과해 기초의회는 문자 그대로 양당체제에 돌입했다. 경북 포항지역의 경우도 12개 지역구에서 28명의 당선인이 배출된 가운데 민주당은 출마한 10명의 후보 중 8명이 당선됐다. 민주당 중앙당 당직자 출신을 비롯 여권 불모지인 지역에서 목소리를 높이고도 남을 만한 강경파들이 많아 향후 지방의회 운영을 놓고 다수당인 자유한국당과의 마찰이 예상된다. 이에 따라 자유한국당이 독식하며 지방의회 운영을 좌지우지하던 시절은 가고, 민주당과의 협치가 원만한 지방의회 운영에 중요한 변수로 떠올랐다.

◇ 한국당 지도부 총사퇴…수습방안 고심

한국당은 선거 참패직후 홍준표 대표를 비롯한 최고위원 등 당 지도부 전면사퇴와 함께 비대위 구성을 통한 당 수습방안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지방선거 직후 지난 15일 열린 자유한국당 비상의원 총회 분위기는 자못 비장했다. 김성태 당대표 권한대행은 이 자리에서 “이번 선거는 저희들에게 아직 사그라들지 않은 국민적 분노가 우리 당에 대한 심판으로 표출된 선거였고, 국민들이 자유한국당을 탄핵한 선거”라면서 “국회청산, 기득권 해체, 자신을 희생하지 않으려는 보수로는 더 이상 설자리가 없다. 무사안일주의, 보신주의, 뒤에서 딴생각만하고 잿밥에만 눈독을 들이는 구태보수 청산하고 노욕에 찌든 수구기득권 다 버려 보수이념의 해체, 자유한국당 해체를 통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아울러 그는“우리당이 처해있는 정치생태계도 바꿔야 한다. 우리당의 구조, 체제, 관행과 관습, 그 모든 것을 바꿔야 새로운 세력이 등장할 수 있고 새로운 도전이 가능해진다”면서 “물러날 분 들은 뒤로 물러나고 확실한 세대교체 이뤄야 한다”고 당의 인적쇄신과 환골탈태를 예고했다. 4선 이상의 중진의원들은 당의 미래를 논의하기 위한 비공개 모임을 가지기로 했다가 기자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취소했다. 일부 중진의원은 선거 패배 직후부터 당 대표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에 마음이 가있어 혁신적 결정이나 자기희생 방안이 나올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초·재선 의원들의 움직임도 비판대상에 올랐다. 김순례, 성일종, 정종섭 의원 등 초선의원 5명이 “중진 의원 은퇴 촉구”를 한 데 대해 “자기 희생없는 역대급 철판”이란 비판이 제기됐다. 17·18대 국회의원을 지낸 전여옥 전 의원은 최근 페이스북에 “홍준표 대표 시절 입 한 번 뻥끗도 하지 않았던 이름만 초선인 사람들이 ‘갑자기 왜저러지?’싶다… ‘진박 인증 사진’ 찍던 한국당 초선분들은 ‘중진 찜 쪄 먹는 노회한 초선’”이란 신랄한 비판을 쏟아냈다. 이번 선거 패배의 큰 원인 중 하나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 책임이 있는 한국당 의원들이 ‘나몰라라’한 것인 데, 서로 손가락질하며 물러나라는 태도는 부적절하다는 지적이다.

중진의원인 김무성 의원은 이 자리에서 “새로운 세상을 주도할 보수의 가치관을 정립하고 당에 새바람을 일으켜야 하며, 새로운 보수정당 재건을 위해 저부터 내려놓겠다”고 차기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고, 이어 초선인 윤상직·정종섭 의원이 불출마할 것으로 알려졌다. ‘친박계 좌장’인 8선의 서청원 의원도 “당에 도움을 드릴 수 없기에 조용히 자리를 비켜드리겠다”며 탈당을 선언했다.

◇ 보수당에 바라는 TK민심의 속내

보수당을 지지하는 시민단체인 경북희망연대 강형우 대표는 논평을 통해 “이번 6·13선거는 보수의 참패가 아니라 자칫 극우로 추락하는 ‘보수정당’을 국민들이 심판한 선거였다”면서 “국민의 충분한 동의를 얻기 위해서는 한국 보수의 이념과 진영을 도덕으로 재정립하고 보수와 중도, 아울러 진보까지 거중조정자 역할을 할 수 있는 온건 보수의 어른들이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보수당의 18대 총선승리를 선사했던 전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나 민주당의 전남도시자 출신인 이낙연 국무총리만큼이나 포용력과 확정성이 강한 야전사령관으로 일컬어지는 김관용 경북지사 등이 백의종군해 ‘노마지지’의 길을 찾아 온건한 보수의 씨앗을 청년들에게 뿌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지난 1993년 설립된 전국 환경운동단체의 연합체인 환경운동연합도 지방선거 직후 논평을 통해 “이번 선거는 지난 과오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 정치세력에 대한 냉엄한 심판”이라며 “신규원전 중단, 물관리일원화, 4대강재자연화 등의 주요 국정 과제에 대해서 뚜렷한 명분 없이 무조건적인 반대를 일삼아온 보수당은 뼈저린 반성없이는 당의 존립자체가 어려울 수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 만큼 궤변을 내려놓고 사회의 건전하고 합리적인 시민을 대변하는 보수로서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지방선거 이후 새로운 보수의 등장을 바라는 목소리는 어느때 보다 높다. 사실 TK지역이 보수당의 텃밭으로 오랫동안 자리매김해오는 동안 지역 정치권의 경쟁력은 차츰 활력을 잃고 무너졌다는 분석을 내놓는 이들이 적지않았다. 선거때면 TK지역은 늘 ‘집토끼’ 신세였고, 보수당은 ‘산토끼’를 잡으러 산과 들로 다녔다. 그 동안 집토끼는 굶주리고, 외면받는 찬밥신세에 처해왔다는 것이다. 실제로 대구가 수 십년 동안 지역총생산이 최하위에 머물러도 획기적인 대책 하나 세우지 못한채 시들어가고 있고, 경북지역 역시 지역 출신 대통령을 여러 번 배출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속도로망이나 국도, 철도 등 사회간접자본인 SOC투자가 제대로 돼 있지 않아 많은 지역이 발전의 동력을 원활하게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 보수재건은 인적청산과 쇄신이 열쇠

보수당인 자유한국당, 그중에서도 텃밭이었던 TK지역에서 보수당을 재건하기 위한 핵심은 인적쇄신과 함께 새로운 인물을 영입하는 데 있다는 게 지역 정치권의 일관된 진단이다.

막말로 악명높은 홍준표 전 대표는 지난 16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마지막으로 막말 한 번 하겠다”며 “고관대작 지내고 국회의원을 아르바이트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 추한 사생활로 더 이상 정계에 둘 수 없는 사람, 국비로 세계 일주가 꿈인 사람, 카멜레온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변색하는 사람, 감정 조절이 안 되는 사이코패스 같은 사람이 한국당에 있다”고 썼다. 또 “친박(친박근혜) 행세로 국회의원 공천을 받거나 수차례 하고도 중립 행세하는 뻔뻔한 사람, 탄핵 때 줏대 없이 오락가락하고도 얼굴·경력 하나로 소신 없이 정치생명 연명하는 사람, 이미지 좋은 초선으로 가장하지만, 밤에는 친박에 붙어서 앞잡이 노릇 하는 사람”이 있다고도 했다. 홍 대표는 “지난 1년 동안 당을 이끌면서 가장 후회되는 것은 비양심적이고 계파 이익을 우선하는 일부 국회의원들을 청산하지 못했다는 점”이라며 자신이 대표로 있는 동안 한국당의 인적쇄신을 이루지 못했던 점을 아쉬워했다. 막말이긴 하지만 보수당의 쇄신에 있어 핵심을 찌른 말이었다.

황태순 정치평론가 역시 “보수당의 쇄신은 인적쇄신이 새로운 보수재건에 있어 알파이자 오메가”라고 단언하면서 “보수당이 국민들에게 새롭게 다가서려면 영국의 토니 블래어총리나 엠마뉴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처럼 젊고 개혁적인 정치인을 영입해 정치에 희망을 불어넣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토니 블래어 영국총리는 지난 1994년 41세의 나이로 최연소로 노동당(Labour Party) 당수가 된 데 이어 1997년 총선에서 승리해 18년 만에 노동당 출신의 총리가 된 인물이며, 엠마뉴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역시 대통령 경제보좌관, 경제산업디지털부 장관을 지낸 뒤 39세의 나이로 프랑스 역대 최연소 대통령이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요약하면 오랫동안 TK지역민들의 표심을 독차지해온 자유한국당이 TK민심을 잃고 환골탈태의 요구에 직면하게 된 원인은 보수당으로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최순실 국정농단 게이트에 책임있는 정치인들의 자성과 희생이 없이 심판대에 오른 점, 그리고 당내 새로운 권력의 구심점이자 대권후보를 잉태하지 못한 점 등 두 가지다. 따라서 자유한국당이 새로운 보수로 거듭 나려면 바로 인적쇄신과 새로운 인물의 영입, 두 가지가 반드시 선행돼야 할 것이라는 게 TK지역민들의 한결같은 견해다.

/김진호기자 kjh@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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