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여인들 ③

▲ 김유신을 궁궐로 불러 출정(出征)을 명령하는 진덕여왕의 모습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그렸다. /삽화 이찬욱

서기 649년. 백제는 은상(殷相)을 선봉장으로 하는 7천여 명의 군대를 신라로 보내 7개의 성을 동시에 공격한다. 태풍 앞에 세운 촛불 같아진 나라의 운명. 왕은 궁궐로 대장군 김유신(595~673)을 불러들인다.

목숨을 건 수많은 전투에서 잔뼈가 굵은 김유신은 신라의 군권(軍權)을 실질적으로 장악한 인물인 동시에 정치적으로도 무시할 수 없는 거물이었다. 그러나 명령을 내리는 왕의 카리스마는 김유신을 압도했다.

“병사를 내어줄 것이니 속히 전장으로 달려가 위기에 빠진 이 땅과 백성을 구하라. 패배는 용납하지 않겠노라.”

휘하의 장수 수천 명을 도열시킨 김유신이 답한다.

“명을 받들어 기필코 승전(勝戰)의 소식을 주군께 전하겠나이다.”

다소의 상상력이 더해진 이 장면에 등장하는 왕은 누굴까? ‘천하의 김유신’을 쥐락펴락한 이는 예상 외로 남성이 아닌 여성이었다. 선덕여왕의 사촌동생이자 신라의 28대 왕인 진덕(재위 647∼654).

진안갈문왕(眞安葛文王)과 월명부인(月明夫人) 박씨 사이에서 태어난 진덕여왕은 그 풍모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고 한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엔 이런 기록이 남아있다.

“자태가 풍만하고 아름다웠던 진덕여왕은 키가 7척(尺)에 이르렀다. 또한 늘어뜨리면 팔이 무릎 아래에 닿을 정도로 길었다.”

경주대학교 이강식 교수는 성신여자대학교 경영연구소가 발행한 논문 ‘신라 세 여왕의 삶과 경영’에서 아래와 같은 설명을 덧붙인다.

“진덕여왕의 이름은 승만(勝曼)인데 이는 ‘특별히 뛰어난 아름다움’으로 해석할 수 있다. 7척을 신라 때의 당척(唐尺)으로 계산하면 207.9cm가 되니 당시로나 지금으로나 사실 거인 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장대한 자태도 등극하는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이는 큰아버지인 진평왕이 신체가 장대한 것에서 유전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에는 김유신 앞세우고
정치에는 김춘추 활용
삼국통일 완수의 큰 발판 만들어

◆ 수차례의 외침을 극복한 용기 있는 여왕

사실 고대의 역사를 기록한 문헌이나 예술작품엔 크건 작건 과장이 섞여 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관우는 어지간한 10대 청소년의 몸무게와 맞먹는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를 가벼운 나무젓가락 다루듯 한다. 뿐인가. ‘수호전’의 무송은 맨주먹으로 거대한 식인 호랑이의 머리뼈를 부숴버리는 초인적 괴력을 보여준다.

비단 중국만이 아니다. 잭 스나이더 감독이 연출한 영화 ‘300’에서 페르시아 제국의 4대 왕 크세르크세스(Xerxes·재위 BC 486∼BC 465)는 키가 진덕여왕의 2배쯤 되는 4~5m로 그려진다.

하지만 그 옛날 왕이나 영웅호걸에 대한 묘사가 마냥 과장스럽기만 한 것일까? 진덕여왕의 경우를 꼼꼼히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듯하다.

앞서 언급한 649년 침공 외에도 진덕여왕은 즉위한 직후부터 백제와 고구려 군대의 끊임없는 공격에 맞서야 했다.

진덕여왕이 명령하고 김유신이 실행한 방어작전은 성공적이었다. 647년에는 무산성과 감물성을 포위한 백제군을 격퇴했고, 이듬해에도 서라벌 서쪽을 노리는 백제 무장 의직(義直)으로부터 신라의 10개 성을 지켜냈다. 이강식 교수는 위의 논문에서 “사촌누이를 반대한 비담과 염종의 반란을 겪으며 그다지 우호적이지 못한 상황 속에서 즉위한 진덕여왕은 누란의 위기에 빠진 신라 국정을 개혁해 삼국통일의 초석을 다져야한다는 주요한 과제를 안고 탄생했다”고 쓰고 있다. 안으로는 반란의 잔당을 진압하고, 밖으로는 여러 차례의 외침을 효과적으로 극복했다는 점에서 진덕여왕의 용기와 군사적 능력에 후한 점수를 주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

여왕의 관심은 군사조직의 정비에까지 이어져 651년에는 왕궁의 호위를 담당하는 부서를 신설했고, 652년엔 궁병(弓兵)들이 주축이 된 부대를 만들기도 했다.

일부 역사학자들 사이에선 진덕여왕이 김유신과 김춘추(604~661)가 ‘허수아비로 세워놓은 왕’이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7세기 중반 신라의 정치·사회적 상황을 어떤 잣대를 통해 어떤 방식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이 주장은 힘을 얻을 수도, 잃을 수도 있다. 아래와 같이 정반대로 말하는 학자도 존재하니까.

“선덕여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걸 바로 옆에서 지켜보며 안목을 키운 진덕여왕의 상황 판단능력과 정치력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전쟁에는 김유신을 앞세우고, 정치적 감각이 탁월했던 김춘추는 당나라와의 외교에 적극 활용했다. 이것만 봐도 진덕여왕의 용인술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 ‘삼국사기’에 기록된 진덕여왕은 키가 7척에 이르는 여인이었다. 보통의 남성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던 셈이다.  /삽화 이찬욱
▲ ‘삼국사기’에 기록된 진덕여왕은 키가 7척에 이르는 여인이었다. 보통의 남성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던 셈이다. /삽화 이찬욱

◆ ‘외교’ 분야에서도 탁월한 능력 보여줘

백제와 고구려의 침탈에 용기 있게 맞선 통치자였던 진덕여왕은 ‘외교’에서도 발군의 능력을 보였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강식 교수의 논문 ‘신라 세 여왕의 삶과 경영’은 진덕여왕의 외교 전략을 ‘자주화’와 ‘대당 외교의 병행’으로 요약한다.

“진덕여왕은 즉위 원년(647년) 연호를 태화로 고쳤다. 그리고 같은 해 초겨울 신궁에서 친히 제사를 지냈는데, 이는 신라의 천신교 의례를 수행함으로써 자주성을 표방한 것이다.”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서 ‘자주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제화 전략도 필요했다. 이를 위해 진덕여왕은 ‘중국(당나라)과의 외교’라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 교수는 신라와 당나라가 우호적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던 당대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백제와 고구려의 침략에 시달렸던 신라와 고구려 원정에 두 번이나 크게 실패한 당나라의 이해관계가 일치한 결과다.” 여기에 이런 문장도 덧붙이고 있다.

“진덕여왕의 대당 외교 성공은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해 삼국통일을 완수하게 되는 발판을 만들었다.”

8년의 재위 기간 동안 국방과 외교 분야에서 진덕여왕이 이룬 일은 결코 적지 않았다. 그녀에 관한 보다 정밀한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 경주시 석장동 화랑마을의 조형물. 신라의 화랑은 백제와의 여러 전투에서 무공을 세웠다.
▲ 경주시 석장동 화랑마을의 조형물. 신라의 화랑은 백제와의 여러 전투에서 무공을 세웠다.

신라를 읽는 또 하나의 키워드 ‘골품제’

뼈에도 품격이 있다?

신라는 철저한 계급사회였다. 타고난 혈통과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부모를 통해 얻게 되는 지위가 평생을 지배했다. 언필칭 골품제(骨品制)다.

골품제의 최상위 계급은 성골(聖骨). ‘성스러운 뼈’로 해석 가능한 성골은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가 왕의 핏줄을 가진 사람을 지칭했다. 신라의 두 번째 여왕인 진덕은 성골 출신의 마지막 왕이었다.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발행한 책 ‘신라의 사회 구조와 신분제’에는 아래와 같은 설명이 실려 있다.

“골품제는 신라의 역사와 사회를 들여다보고 살피는 창(窓)과 같은 역할을 한다.

동시대에 존재했던 고구려와 백제는 물론 비슷한 시대의 외국에서도 유래를 찾기 어려운 독특한 신분제였고, 신라 사회를 살아갔던 많은 사람들의 정치·사회 활동과 일상생활까지 두루 영향을 미쳤던 법제도였기 때문이다.”

▲ 진덕여왕릉. ‘성골’ 출신의 마지막 왕이 경주시 현곡면 울창한 소나무 숲에 잠들어있다.
▲ 진덕여왕릉. ‘성골’ 출신의 마지막 왕이 경주시 현곡면 울창한 소나무 숲에 잠들어있다.

실제로 그랬다. ‘성골-진골(眞骨·부모 중 한 사람이 왕족의 혈통인 사람)-6두품-5두품-…1두품’으로 나뉜 골품제 아래서 자신의 계급이 확정되면 오를 수 있는 벼슬의 상한선에서부터 입는 옷, 사용하는 생활용품, 집을 지을 수 있는 규모까지가 함께 정해졌다.

심지어 여성들의 속치마와 장신구 색깔에까지 골품제가 끼어들었다. 현대인의 상식으론 이해가 힘들다. “너는 성골이 아니라 6두품이니 아무리 돈이 많아도 샤넬 립스틱을 쓰면 안 된다”고 한다면 21세기 여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중앙집권제 국가로 성장하던 신라가 지역 토호들의 세력을 흡수하며 만들어진 골품제는 많은 폐단을 낳기도 했다. 능력과 노력이 아닌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출신 성분’을 인간의 판단 기준으로 삼았기에 당연한 결과였다. 그래서 몇몇 역사학자들은 신라 멸망의 원인을 ‘골품제가 야기한 차별’에서 찾기도 한다.

인도의 ‘카스트(Caste)제도’는 신라의 골품제와 여러 측면에서 유사성을 보인다. 카스트제도 역시 사람을 브라만(Brahman·성직자), 크샤트리아(Ksatriya·귀족과 군인), 바이샤(Vaisya·평민), 수드라(Sudra·천민)의 네 가지 계급으로 나누고 각 계급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을 정해주는 건 물론, 결혼까지 같은 카스트끼리만 하도록 허락했다.

▲ 진덕여왕의 능묘(陵墓)를 호위하고 있는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 중 하나.
▲ 진덕여왕의 능묘(陵墓)를 호위하고 있는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 중 하나.

현재 법적으로는 카스트제도가 폐지됐다. 그러나 아직도 인도 사람들의 인식 속에는 이 제도의 그림자가 깊숙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 생생한 사례를 인도를 여행한 몇 해 전 목격하기도 했다.

기자가 묵은 남부 인도의 호텔 주인은 브라만이었는데, 남이 입었던 옷을 절대로 만지지 않는다고 했다. 인도에서 빨래는 천민 계급인 수드라가 한다.

뭄바이에선 더 황당한 일을 겪었다. 브라만 계급인 택시기사가 목적지로 가던 중 갑자기 차를 세우고 태양을 향해 기도 올리는 걸 본 것이다.

이처럼 골품제와 카스트제도는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기엔 불합리하고 우스꽝스런 사회 시스템이다. 하지만, 그 옛날 신라와 인도를 해석하기 위한 중요한 키워드이기도 하다는 걸 부정하기 힘들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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