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여인들 ⑤

▲ 신라의 시가 ‘해가(海歌)’에 등장하는 수로부인은 상상 속 동물인 용을 매혹할 만큼 아름다운 여성으로 묘사된다.  /삽화 이찬욱
▲ 신라의 시가 ‘해가(海歌)’에 등장하는 수로부인은 상상 속 동물인 용을 매혹할 만큼 아름다운 여성으로 묘사된다. /삽화 이찬욱

역사와 문학 연구자들로부터 ‘신라의 대표적 시가’로 지목받는 ‘헌화가’와 ‘해가’. 숭실대학교 국문과 이경재 교수가 여기에 등장하는 매력적인 신라 여성 ‘수로부인’이 한국의 대표적인 작가 김동리(1913~1995)의 소설과 서정주(1915~2000)의 시에서 어떻게 묘사·해석되고 있는지 분석한 글을 보내왔다. 독자들을 위해 가감 없이 게재한다. /편집자 주

신라는 기원전 57년부터 935년까지 992년간 존속했던 왕조다. 한반도에 존재했던 왕조 중 유일하게 1000년을 지속한 신라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품고 있다. 그 이야기의 가닥 중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여성들의 다양한 활약상이다.

신라시대에는 한국에서 유일하게 세 명의 여왕(선덕·진덕·진성)이 존재했고, 화랑의 전신(前身)으로 이야기되는 원화(源花)들이 활동하기도 했다. 여러 연구들은 성리학에 찌든 조선시대보다 신라 여성들의 삶이 더욱 활기찼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신라 시대 여성들 중에서도 한국문학에서 자주 호출된 이로는 신라 33대 왕인 성덕왕(재위 702~737) 때 사람인 ‘수로부인’을 들 수 있다.

대표적인 신라시대 시가로 꼽히는 ‘헌화가(獻花歌)’와 ‘해가(海歌)’의 배경 설화에 등장하는 수로부인은 ‘삼국유사’ 제2권 ‘기이(紀異)편’에 등장한다. 남편 순정공(純貞公)이 태수로 임명된 강릉으로 가던 수로부인은 일행과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으며 휴식을 취한다.

이때 수로부인은 천 길이나 되는 절벽 위에 활짝 핀 철쭉꽃을 발견했고 “꽃을 꺾어 바칠 사람 그 누구 없소?”라고 외친다. 순정공을 포함한 모든 이가 망설이고 있을 때, 암소를 끌고 지나던 한 노인이 꽃을 꺾어서는 노래까지 지어 바친다.

그때 노인이 꽃과 함께 지어 바친 노래가 4구체 향가 중 절창으로 꼽히는 ‘헌화가’다.

자줏빛 바윗가에

잡고 있는 암소 놓게 하시니,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이틀 후에는 임해정(臨海亭)에서 수로부인이 바다의 용에게 납치당한다. 모두가 어쩔 줄을 모를 때, 한 노인이 나타나 사람들이 모여 막대기로 언덕을 치며 노래를 지어 부르면 부인이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을 따랐더니 실제로 수로부인이 다시 나타났다. 이때 사람들이 불렀던 노래가 바로 ‘해가’다. 이후에도 자태가 빼어난 수로부인은 깊은 산이나 큰 연못을 지날 때마다 신(神)적인 존재들에게 납치당하고는 한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수로부인은 한국 현대문학사의 거장이라고 할 수 있는 김동리와 서정주에 의해 작품화된다.

김동리는 1977년 출판사 지소림(智炤林)에서 ‘김동리 역사소설(신라편)’을 발간한다. 여기 수록된 16편의 소설은 석탈해, 최치원, 장보고, 눌지 왕자, 왕거인, 강수 선생, 우륵, 김명, 최치원, 김현, 엄장, 기파랑, 미륵랑 등을 다루고 있다. 이 중에는 수로부인을 다룬 ‘수로부인’이라는 단편도 있다.

이 작품에서 수로부인은 한마디로 ‘신명에 취한 여인’이다. 용모가 빼어나고 가무에 재주가 남다른 수로부인은 열세 살에 나을신궁의 신관(神官)이 된다. 이후 펼쳐지는 수로부인의 사랑, 결혼, 이후의 행적은 모두 신적인 존재인 ‘검님’의 뜻에 따른 것이다.

화랑 응신의 피리 소리에 이끌려서 그와 만나게 되는 것도 검님의 뜻에 따른 것이고, 이후 순정공의 청혼을 받아들이는 것도 초월적인 힘에 이끌린 결과이다. 남성들과의 관계도 육체성은 배제된 정신적인 것으로 그려진다.

응신과 수로부인이 만날 때도, 응신은 피리를 불고 수로부인은 그에 맞추어 가무(歌舞)를 할 뿐이다. 수로부인은 결혼 이후에도 제단을 만들어 두고 아침저녁으로 검님을 배례하며, 제단에 올렸던 음식만 먹는다.

“항상 신명에 취해 지내는” 수로부인에게 일어나는 일은 모두 검님의 뜻에 따른 것이다. 수로부인에게 절벽의 꽃을 꺾어다 바친 노인도, 나라에서 제일가는 도사인 이효 거사가 후일의 대업을 위해 보낸 것으로 그려진다.

작품의 마지막은 나라에 큰 가뭄이 들자, 이효 거사가 주관하는 기우제에서 월명 거사가 된 화랑 응신이 피리를 불고 수로부인이 춤을 춤으로써 비를 불러오는 것이다. 이 모든 일도 결국은 신명의 뜻과 응감에 따른 것으로 그려진다.

이 작품에서 수로부인은 검님이라는 자연의 질서와 하나가 된 성스러운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김동리의 친구이자 문협정통파(文協正統派)로서 순수문학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미당 서정주 역시 ‘노인헌화가(老人獻花歌)’라는 시를 통해 수로부인을 형상화하였다.

이 시는 1961년 정음사(正音社)에서 간행된 ‘신라초(新羅抄)’라는 서정주의 네 번째 시집에 수록돼 있다. 제목에도 선명하게 드러나듯이, 이 시집은 신라시대의 인물과 각종 설화 등을 주요한 제재로 다루고 있다.

불교 정신을 중심으로 한 신라에 대한 관심은 다음 시집인 ‘동천(冬天)’까지 지속된다. 신라에 대한 탐구는 미당 시의 중심 줄기를 형성하는 한국의 전통과 영원주의 탐구에 그 맥락이 닿아 있다.

‘노인헌화가’는 제목처럼 암소를 끌고 절벽 위의 꽃을 따다 수로부인에게 바친 노인을 화자(話者)로 내세운다. 이 시는 서정주 특유의 능청과 넉살로 노인을 둘러싼 온갖 형이상학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걷어내고 있다.

 

▲ 암소를 탄 노인이 수로부인에게 꽃을 꺾어 바치는 ‘헌화가(獻花歌)’의 한 장면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그렸다.  /삽화 이찬욱
▲ 암소를 탄 노인이 수로부인에게 꽃을 꺾어 바치는 ‘헌화가(獻花歌)’의 한 장면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그렸다. /삽화 이찬욱

노인이 꽃을 바친 행위는 심플하게 “이것은 어떤 신라의 늙은이가/젊은 여인네한테 건네인 수작이다”라고 간명하게 정리된다. 노인은 신적인 존재도 무격(巫覡)도 아닌 사랑의 달콤함에 어깨가 들썩이는 그저 인간일 뿐이다.

그렇기에 “자기의 흰 수염도 나이도 다아 잊어” 버리고, “남의 아내인 것도 무엇도 다아 잊어” 버리고, 심지어는 벼랑의 그 높이도 “다아 잊어” 버리고, “꽃이 꽃을 보고 웃듯이 하는 그런 마음씨”로 꽃을 따다 바친 것이다.

이 시에서 ‘헌화가’는 한 여인의 마음을 얻기 위해 “남의 집 할아비가 지나다가 귀동냥하고 도맡아서 건네는” 작업 멘트가 된다.

이러한 노인의 성격에 걸맞게 수로부인도 인간의 정감에 충실한 모습이다. 아름다운 꽃을 보고서는 “아이그마니나 꽃도 좋아라/그것 나 조끔만 가져 봤으면”이라고 지극히 인간적인 목소리를 낸다.

흥미로운 것은 이 말이 “꽃에게론 듯 사람에게론 듯 또 공중에게론 듯” 발화된다는 것이다. 수로부인은 자신의 남편과 동행자에게만 꽃을 따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미지의 대상(공중)을 향해서도 꽃을 따 달라고 하는 것이다.

꽃이 가진 중의성까지 덧보태져 이 작품의 수로부인 역시 암소를 끄는 노인만큼이나 인간적 욕망에 충실한 상태임이 드러난다.

‘노인헌화가’는 노인과 수로부인을 둘러싼 공기(空氣)가 “그들의 입과 귀와 눈을 적시면서/그들의 말씀과 수작들을 적시면서/한없이 親한 것이 되어가는 것을/알고 또 느낄 수 있을 따름이었다”로 끝난다. 어느새 수로부인과 노인은 같은 공기에 적셔진 친한 사이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수로부인 이야기가 수록된 ‘삼국유사’는 고려 충렬왕 시절 보각국사 일연(一然·1206∼1289)이 지은 책이다. 이 저서는 우리 민족의 소중한 역사서이자 신화집이며 동시에 빼어난 문학작품집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여기 실린 이야기들은 해석의 폭이 넓고도 깊다. 수로부인 이야기도 마찬가지여서, 이 작품의 수로부인은 水路라는 이름처럼 물로 대표되는 자연과 소통하는 신화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바다로, 산으로, 못으로 수시로 불려 다니는 그녀는 사실 자연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한국 현대문학사의 거장인 김동리와 서정주는 바로 수로부인이 지닌 이 자연과의 일체성에 공통적으로 주목하고 있으나 그 자연을 해석하는 방식은 각기 다르다.

김동리에게 천지자연은 하나의 유기체이며, 그 유기체의 원리 속에서만 인간은 온전한 존재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수로부인’에서 그 유기체의 원리를 인격화한 것이 검님이고, 수로부인은 그 검님의 신명과 감응에 따름으로써 ‘생의 구경(究竟)적 형식’을 완성하게 된다.

서정주가 파악하는 자연은 인간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는 이성에의 끌림에 충실한 모습을 통해 드러난다. 이 자연에 비하자면 나이니 지위니 하는 것은 성가신 인공의 장식품에 불과하다.

수로부인은 과감하게 그 장식품을 떼어낼 줄 아는 여인이고, 그렇기에 결국 “맑은 공기” 속에서 암소를 끄는 노인과 하나로 어우러질 수 있는 것이다.

김동리와 서정주가 형상화한 신라 여인 수로부인의 모습에는 한국의 고유한 정신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숨 쉬고 있다.

문학평론가 이경재

‘매혹적인 신라 여인’ 수로부인. 서정주와 김동리는 자신들의 문학에서 이 여성을 어떻게 그려냈을까?

이 궁금증에 답하는 원고를 본지에 보내온 문학평론가 이경재는 1976년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국문과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박사학위 논문은 ‘한설야 소설의 서사시학 연구’.

2006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돼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시작했고, 문예지 ‘문학수첩’의 편집위원을 지냈다.

비평집 ‘단독성의 박물관’과 ‘끝에서 바라본 문학의 미래’를 등을 썼으며 ‘한설야와 이데올로기의 서사학’ ‘한국 현대소설의 환상과 욕망’ 등의 연구서를 펴내 주목받았다.

지난해 출간한 ‘한국 현대문학의 공간과 장소’는 평단과 독자들로부터 “공간의 이해를 통해 문학의 주제에 접근한 독특한 저작”이라는 호평을 얻어내기도 했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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