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민호의 살며 생각하며 (26)

안드레이 예피므치 라긴이라는 인물은 체홉 소설에 나오는데 정신병을 치료하는 의사다. 소설 속에서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 정신병동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정상인이 정신병자 취급을 받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또는 스스로 미친 척하지 않고는 한밤중 같은 대낮을 살아갈 수 없다.

이 라긴이 등장하는 소설을, 나는 하필 늘 서정작가로나 오해 사는 이효석 때문에 보았는데, 왜냐, 그가 말년에 체홉을 즐겨 봤고, 또 ‘6호실’이라는 소설 얘기가 그의 글 속에 나오기 때문이다. 요즘 옛날 소설은 안 읽는 추세이기는 하지만 한번쯤 찾아봐도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눈 크게 뜨고, 세상 밝게 보려는 사람은 스스로 미치기 전에 세상이 미쳤다 생각하기 쉽고 다음엔 세상이 그를 미쳤다 하여 외진 데 가둬놓으려 하게 마련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알고 가만히 있으며, 또 가만히 있지 않아서 감당해야 하는 고통이나 공포보다 차라리 미치는 것도 좋다.

그래서 루쉰도 그의 명철한 의식을 정신병자에 의탁해서 ‘광인일기’를 썼고 나아가 ‘아큐정전’에서도 제 정신은 아닌 주인공을 등장시켰으며, 이 소설에 필시 영향 주었을 고골의‘광인일기’도 기억 희미하지만 그런 류의 소설, 어찌 착란과 광기와 환각 아니고 미친 듯한 현실을 참아낼 수 있을까. 염상섭의 문제작 ‘표본실의 청개고리’에 등장하는 광인 김창억, 그는 동서 평화를 주창하는 광인인데, 미치지 않고야 그런 것이 어찌 가능하냐 이 말이다. 일본이 대동아를 주장하며 결국 서구, 미국과 혈전을 벌이고서야, 그 모든 살육 끝에 평화는 왔다.

세상이 바뀌어 정상이 된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허나 역시 착란이었다. 유튜브를 보면 정신착란자들이 아직도 태극기를 휘날리며 열연을 하고 있는데 연기자들은 자신이 연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정말 현실 속을 살고 있다 여길까. 그러나 착란은 비단 태극기에만 있지 않다. 우리는 혹시 세상이 바뀌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 아닐까. 물론 세상은 바뀌었고, 그런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지 않은 줄 모르고 바뀌었다 믿는 착란자들도 많고, 세상을 바꾸는 축이 어디며 자신이 어디 서 있는지 아는 이들은 차라리 많지 않다고나 해야 한다. 또 바꾼 사람들도 사실은 바뀐 사람들 비슷하다고 말하면 그 사람은 참으로 미친 사람이라 할 것인데, 그렇다면 그 시람은 광인 흉내라도 내야 한다.

 

세상이 바뀌면 바뀐 세상답게, 그런 사람답게 살아야 할 것 같은데, 요즘 티비도, 인터넷도, 팟캐스트도 무섭다. 시도 무섭고 시를 쓰는 사람들도 무섭다. 남보고 미쳤다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도 무섭고 이러다 내 자신 정말 미친 사람 되는게 아닌가 해서 더 무섭다. ‘제 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은 없는가?’ 하고 김수영은 물었다. 그러고 보면 그게 벌써 일천구백육십년대였다. 물경 오십 년 지난 지금도 그런 싱거운 질문이 가능하다니, 놀랍지 않은가? 늙은 좀비가 백주에 제 집에 있지 않고 거리에 풀려 나오고 창공을 비상해야 할 독수리는 날개를 잃고 추락해 버렸다.

사람 사는 세상이 이러기도 힘들다. 누가 도대체 이런 무대를 꾸미는가? 맙소사. 이 난장판에 정신 멀쩡한 사람도 있다. ‘사람나라’ 같은 것을 꿈꾸는 사람. 이름은 모른다. 벌써 잊어버렸다.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