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잘 차려진 차례상처럼 책이 차려진 가을입니다. 맛있게 꼭꼭 씹어 읽는 시간이 되시길.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 잘 차려진 차례상처럼 책이 차려진 가을입니다. 맛있게 꼭꼭 씹어 읽는 시간이 되시길.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어릴 때는 모든 일에 형식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집안 대소사뿐만 아니라 명절에 장만해야 하는 음식도 허례허식이라 여겼다. 살다보니 형식이 내 삶을 좌우하고 있었다. 목이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 걸을 때와 단정한 원피스를 입었을 때 내 몸짓은 분명 차이가 난다. 누가 보든 안보든 옷이라는 틀이 내 동작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니 형식을 바꾸면 삶이 달라진다.

책은 가까이 있어야 읽는다. 그러므로 형식적으로라도 옆에 둬야 한다. 거실 소파에 가을학기 독서회에서 함께 읽는 두툼한 책과 머리 식힘용 만화책이, 식탁에는 그림책과 여행기가 침대머리맡에는 속도감 있는 추리소설이 놓였다.

칸트는 늘 오후 3시에 산책을 나갔다. 동네사람들은 칸트가 지나가는 시간에 시계를 맞추었다고 한다. 하지만 딱 두 번 지키지 못했다고 하니 한 번은 프랑스 혁명에 관한 기사를 읽다가 또 한 번은 루소의 ‘에밀’을 읽다가 시간이 지나버렸다. 그러니 이번 추석 귀향길 짐 꾸러미에 여기 소개하는 몇 권의 책을 넣어 긴 여행길이 짧게 느껴지길 바란다.

△‘노 임팩트 맨’(콜린 베번 지음)

일 년 동안 지구에 민폐 안 끼치고 살기를 실천한 뉴요커 이야기이다. 절대 뉴욕을 떠나지 않고 누릴 것은 충분히 누린다. 과연 가능한 일일까? 요즘 커피숍에서 종이컵 사용 않기 운동을 보면서 이런 운동을 먼저 실천한 콜린 베번의 선구자적인 발자취를 따라가 보기로 하자.

부인과 어린 딸과 개 한 마리랑 살면서 쓰레기 하나도 만들지 않기, 전기 사용하지 않기, 교통편 이용하지 않기, 새 물건 사지 않기, 우리고장에서 나는 로컬 푸드만 먹기, 물을 아끼고 오염시키지 않기, 사회에 환원하기. 이것은 역사를 연구하는 고고학자가 지구의 미래를 걱정해서 시작한 일이다.

결심한 첫날 아침, 딸이 침대에서 뛰는데 기저귀가 새고 콧물은 흐르는데 코를 풀 수가 없다. 어쩌면 좋은가. 이 책을 읽으며 내가 하고 있는 또 할 수 있을 것 같은 해 봐야 할 것들을 책 앞장에 적어보았다. 되도록 중고책 사기(2년 넘게 노력 중), 텀블러 들고 다니기(가끔 까먹기도 함), 일주일에 하루 차 두고 나가기(두어 번 하다 못 함), 물 안 사먹고 수돗물 마시기(남편은 사들이지만 나는 끓여먹는 중), 베이킹소다와 식초로 설거지 빨래하기(실천 중), 손 씻고 냅킨 대신 손수건 쓰기( 잘 들고 다님). 지구에 쓰레기 남기지 않는 노 임팩트 맨이 되기 위한 작은 몸부림이다.

이 책엔 한국이 자주 등장한다. 무지 반갑다. 두부 만드는 아저씨, 조계종의 스님이야기 등. 글쓴이는 아재개그를 하며 작은 위트로 나를 웃기려 한다. 그 중 ‘우리 둘 중 누구 팔뚝이 더 굵은지’는 어떤 영어를 이렇게 번역했을까 궁금해서 읽다 말고 영어선생님에게 물어봤다. 밑줄도 많이 긋고 접고 하면서 내가 지구에 끼치는 나쁜 영향을 깊게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자기 앞의 생’(에밀 아자르 지음)

로맹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쓴 소설이다. 로맹가리의 가리는 ‘태우다’란 뜻이고 에밀 아자르의 아자르는 ‘굽다’라는 뜻이란다. 자신의 생을 태우고 굽다가 다 표현했다고 느낄 때 자살해버렸다.

소설의 주인공 모모는 우리가 불렀던 노래에 등장한다. ‘모모는 철부지 모모는 무지개...인생은 사랑 없인 살 수 없다는 것을 모모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노래가 자기 앞의 생을 읽고 만든 것이라니 소설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다. 모모를 키운 것은 보모 로자 아줌마와 아래층의 하밀할아버지, 그리고 늘 함께 한 인형 아르튀르였다. 하밀 할아버지 입을 통해 빅토르위고의 레미제라블이 겹쳐진다. 가장 낮은 곳에서 힘겨운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로맹가리는 비굴하지 않게 유머 있게 촌철살인으로 써 내려갔다. 러시아 출생으로 프랑스에 정착한 작가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한 성장소설이다. 콩쿠르상을 받은 로맹가리가 다시 신인 에밀 아자르란 이름으로 죽을 때까지 4권의 책을 출판해서 세상은 새로운 천재작가가 등장했다고 환호성을 높였다. 그의 유작을 통해서 세상은 두 사람이 동일 인물임을 알게 되었다.

좋은 문장에 밑줄을 긋다가 접다가 했더니 책이 불룩해져버렸다. 작가는 책 속에서 첫 질문으로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있나요? 묻는다. 그 대답은 마지막 문장에 나와 있다. 확인해보시길.

△‘사피엔스’(유발 하라리 지음)

이 작가 글 쓰는 태도 완전 마음에 든다. 약간은 삐딱한 유머와 센스를 장착한 천재작가이다. 천재는 99퍼센트의 노력과 1%의 영감을 가진 사람이라고 했던가. 유발하라리는 아마 1%의 영감을 100%로 발휘하는 사람이다.

사피엔스들이 살아온 시간들을 600쪽 넘게 서술해놓은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무척 위로 받았다. 사람은 뒷담화하며 언어가 발달했다. 오호 그랬어! 흉보는 일이 재밌는 건 내가 나쁜 사람이라서가 아니었어, 본능이었던 거야. 음 하하하! 입이 등장한 것은 생명체가 영양소를 몸 안으로 섭취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지만, 동시에 키스하고 말하는데도 사용한다. 람보는 수류탄 핀을 뽑을 때도 써 먹는다고 말한다. 가끔 이렇게 소소한 재미를 준다.

인간의 큰 특징인 직립보행이 우리 여성에게 큰 역경이었다. 똑바로 걸으려니 엉덩이가 좁아져 아기가 나오는 산도가 좁아지고, 아기 머리는 점점 커져서 자연선택으로 이른 출산을 선호하게 됐다. 많은 포유동물이 태어나자마자 걸을 줄 아는데 인간의 아기는 무력하다. 여러 해 육아를 해야하니 출산과 육아를 독박한 여성에게 제일 가혹한 시스템이다.

사피엔스는 천재 유발 하라리도 다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다. 아라비아인들은 인도인이 만든 숫자란 것을 세계 사피엔스들에게 전해주었으면서 정작 본인들은 다른 숫자를 사용한다고 하니, 아~오묘한 사피엔스들이여!

△‘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엘리자베스 키스 지음)

그림책이다. 1920~1940년의 우리나라를 그린 귀한 자료가 담겨있다. 화가는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하여 선교사나 친구들의 도움으로 여행을 했고 명승지를 찾아 건물과 풍경화를 그렸다. 교통이나 숙박시설이 불편한 것은 둘째 치고 가장 난처한 일은 그림을 그리려고 캔버스를 펼쳐놓으면 서양 여자 화가를 보려고 순식간에 몰려드는 구경꾼들이었다. 그래서 숙소로 돌아갔다가 해뜨기 전 새벽에 다시 그림 그리러 나간 적이 여러 번이었다.

서울의 동대문, 세상에 모자란 모자는 다 있다는 가게, 남자와 쥐들만이 출입하는 주막, 연날리기, 장기 두기, 훈장님보다 반장이 회초리를 들고 설치는 서당, 그 시절의 우리네의 일상생활이 그림 속에 펼쳐진다.

가장 인상 깊었다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내 가슴이 아프다. 여자 애들은 어떤 때 이름도 지어주지 않고 태어난 순서를 이름 대신 부르기도 한다는 것. 아기를 업은 여자아이의 이름은 영어로 ‘sorry’ 즉 우리말로 섭섭이였고 그 집안에서 다섯 번째 딸로 태어나서 식구들 모두에게 섭섭한 존재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어릴 때부터 남자보다 못한 존재라는 가르침을 받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우리 한국인의 자질 중에 가장 뛰어난 것은 의젓한 몸가짐이라고 한다. 끌려가는 한국 죄수들은 오히려 당당한 모습으로 걸어가고 그들을 호송하는 일본 사람은 초라해 보였다고 썼다. 한국에 대한 작가의 따뜻한 마음이 책 곳곳에 느껴졌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고흐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단시간에 몇 백 장의 그림을 그렸다. 병명은 하이퍼그라피아라 부른다. 히가시노 게이고 또한 한 해에 몇 편의 소설을 써 낸다. 그러함에도 일단 첫 장을 펼치면 끝까지 읽어야 할 만치 재미있는 스토리와 마지막 장까지 반전의 반전을 숨겨두는 치밀함을 잃지 않는다.

이 책을 읽으며 비틀즈의 노래를 들었다. 이야기의 중요한 소재이고 제목이 여러 개 나오니 찾아 듣게 만든다. LP 음반을 사서 듣던 세대였고 DJ 오빠에게 쪽지로 비틀즈의 노래를 신청하던 음악다방 단골이었던 빠순이의 추억이 자꾸만 모락모락 거렸다.

‘특별한 빛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누군가 알아봐준다.’ 중학생 독서회 아이들과 책 속의 이 구절을 읽고 자신의 특별한 빛이 무엇인지 이야기 하자고 했다. 아버지에게서 운동신경을 물려받은 다울인 축구 탁구 농구 다 잘 한단다. 이 녀석은 공부도 반에서 1~2등이다. 또 찬이는 정리의 달인이란다. 책상부터 노트정리까지 깔끔하기로 반 친구들이 인정했다. 진근이는 수학과 피아노에 재능이 있단다. 혁이는 그림을 잘 그리고 민아는 무언가 말하려고 하니 친구들이 키도 크고 외모도 빛난다며 추켜세워 줬다.

아이들이 내 특별한 빛은 무어냐 물었다. 나는 친구가 많다고 했다. 어디서나 친구의 도움으로 해결책을 찾는다 했더니 그것도 재능이 되겠다고 했다. 오늘 친구들이 차를 마시자해서 나가니 태국 갔다 온 현선씨가 스카프를 내민다. 창순씨는 책이 두 권 생겼다며 한 권 나눠 줬다. 며칠 전 은규샘이 여행 후 전리품이라며 망고 양초 잼을 건넸다. 가슴한쪽이 간질간질하다. 나도 저들에게 특별한 빛이 되도록 오늘도 반짝여야겠다.

 

※김순희 수필가 프로필

-2016년 산문집‘작가와비작가’ 출판

-포항수필사랑회원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당선

-경상북도교육청문화원 독서회 강사

/김순희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