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과 함께한 구미공단
② 내륙 최대 국가공단 들어서다

▲ 공단이 조성되기 전 낙동강 모습. /구미시 제공

전자공업 육성으로 경제성장 박차
1969년 ‘구미공업단지’ 설립 추진
도심 중 낙동강 관통, 용수 풍부하고
경부고속도·국도 등 교통요건 좋아
넓은 평야면서 지내력 좋은 낙동강변
국가산업시설 기반 조성에 최적 조건
고향인 구미에 조성 정치적 부담에
박정희 전 대통령 처음부터 반대
이원만 회장 “국가 위해 감수해야” 설득

◇ 국가공단의 필요성 제기

광복이후 6.25전쟁을 겪으면서 한국경제는 말그대로 파탄에 빠져 있었다.

외국의 원조를 통한 전후 환경 개선과 수출을 통한 경제 회복해 안간힘을 쏟았지만 녹녹치 않았다.

3년간 치러진 6.25전쟁은 민간부문의 시설은 물론, 도로·철도·항만·통신·전력·수도·학교 등 사회간접자본을 포함한 일체의 직간접적인 생산시설과 공공시설을 파괴해 버렸다.

외형적인 피해와 더불어 정신적인 타격 또한 심한 상황이었다. 그러다 한국경제는 4.19와 5.16을 거치면서 고도의 성장을 이루는 전기를 마련한다.

특히, 5.16 정부는 미국의 원조가 무상원조에서 차관으로 전환해 원조액을 감소시키는 정책으로 바뀌자 이를 극복하기 위한 수출경제에 집중하게 된다.

정부의 수출지원정책으로 1960년대 수출은 10년동안 23배나 증가하는 가시적인 성과를 이룬다.

하지만 이러한 수출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외화 가득률의 저하, 수출상품의 단순성, 첨단기술부재 등의 문제점이 노출되면서 수출정책은 양적 측면에서 질적 측면으로 변화했다.

그러다 일본이 1964년 올림픽 이후 전자산업 육성으로 빠르게 경제 성장을 하는 것을 지켜 본 한국도 전자공업 육성에 박차를 가한다.

최첨단산업인 전자공업을 육성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은 1970년대 초 세계적인 경제 불황으로 인한 선진국들의 무역장벽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에 정부는 고민을 거듭한 끝에 ‘전자공업진흥 8개년 계획’을 수립한다.

이 계획을 토대로 전국 각지를 대상으로 전자공업과 중화학공업을 육성할 최적의 장소를 물색하게 된다.

수자원개발공사는 당시 4대강 유역 조사사업 자료를 토대로 구미를 산업기지의 최적지라는 결론을 내렸다.

낙동강의 풍부한 수량과 강변의 튼튼한 지반이 산업시설 건설에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 1970년 구미국가산업단지 조성 공사 모습.
▲ 1970년 구미국가산업단지 조성 공사 모습.

◇ 전자산업 육성에 최적지

전자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설립된 구미국가산업단지(이하 구미공단)는 1969년 1월 3일 ‘구미공업단지 설립 추진대회’를 기반으로 같은 해 6월 4일 공업단지사업시행자를 지정함으로써 그 대역사가 시작됐다.

구미공단이 조성된 것은 도심 한 가운데 낙동강이 북에서 남으로 관류하고 있어 용수공급에 유리한 자연적인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서쪽으로 경부선과 경부고속도로와 대구와 김천 등으로 연결되는 국도로 교통의 요충지였으며, 금오산 도립공원과 천생산, 청화산, 냉산 등으로 수려환 자연경관도 갖추고 있다. 여기에 낙동강변이 대부분 넓은 평야로 되어 있어 산업시설기반이 조성되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구미공단이 모래땅 위에 선 공단이라고 말하는 데 이는 제1단지 총 면적의 10% 정도의 모래땅이 전자단지 제3공구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제1단지 부지의 80% 이상이 전답이었고, 10% 정도가 야산, 나머지 10% 정도가 낙동강 유역과 하상이다.

토질을 보면 전답매립지역은 원래 실트(silt)질 점토였고, 그 위에 실트(silt)질 모래로 매립해 지내력이 매우 우수하다.

반도체 등의 전자산업에 있어 지내력은 반드시 갖춰야 할 필수조건이다.

여기에 낙동강을 비롯해 그 지류인 구미천 등의 풍부한 용수 공급도 장점이다.

낙동강의 수질은 Ca+, Mg+의 함량이 비교적 많아 염색에는 약간의 지장이 있는 것으로 판정받았으나, 염색업종이 없는 구미공단의 경우 전 입주업체가 양질의 용수를 공급받을 수 있는 환경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구미지역이 내륙지역이기 때문에 전자산업에 최적지로 꼽힌다.

전자산업의 특성상 염분이 많은 바람은 부품의 정밀성과 생산공정에 피해를 줄 수 있기에 임해지역은 피할 수 밖에 없다.

또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 최첨단 전자업종은 생산공정에서 1㎥당 10개의 먼지도 허용할 수 없기 때문에 금오산과 천생산 등으로 둘러싸인 분지 형태의 구미지역은 중국의 황사도 막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어 최적의 환경조건을 갖추고 있다.

▲ 1978년 구미국가산업단지 모습, /구미시 제공
▲ 1978년 구미국가산업단지 모습, /구미시 제공

◇ 구미공단과 박정희 전 대통령

한국의 실리콘밸리 구미공단의 유치에 있어 고(故)박정희 전 대통령을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수출지원에 중점을 둔 강력한 경제개발정책의 일환으로 세워진 구미공단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통치철학인 ‘빈곤으로부터의 탈피’와 ‘자립경제의 달성’이라는 이상의 실천 현장이기 때문이다.

이에 구미에 공업단지가 들어서는데 있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영향력이 컸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구미지역이 낙동강의 풍부한 수량 등 천혜의 자연조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박정희 전 대통령도 그러한 영향력이 작용할 수 있었다는 점 또한 사실이다. 오로지 구미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고향이기에 국가공단이 건설되었다는 논리는 맞지 않다.

실제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국가공단이 자신의 고향인 구미에 조성되는 것을 반대했다고 전해진다. 코오롱 창업주인 이원만 회장의 회고록에 따르면 박정희 전 대통령은 사석에서 구미에 국가산업단지를 조성하는 것에 대해 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다고 한다.

구미가 자신의 고향이기에 정치적 부담이 많아 반대했다는 것이다.

이에 이원만 회장은 “구미에 공장을 짓는 것은 대통령의 고향이기 때문이 아니라 입지여건이 우수하기 때문이다. 고향이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국가를 위해 정치적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고 설득했다고 한다.

처음 정치적 부담감으로 구미에 국가공단 조성을 받대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구미공단 조성이 결정된 후에는 그 누구보다도 애착을 갖고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공단 조성을 위한 기반시설이 하나둘씩 지어질 때마다 현장을 찾아 격려했고, 지금의 산호대교가 있는 비산에 영빈관(迎賓館)을 지어 그곳에 머물면서 구미공단 조성을 지켜봤다.

▲ 박정희 전 대통령이 머물면서 구미공단 조성을 계획하고 독려했던 구 영빈관. 지금은 LG전자 임직원 휴식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 박정희 전 대통령이 머물면서 구미공단 조성을 계획하고 독려했던 구 영빈관. 지금은 LG전자 임직원 휴식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 지역인들의 국가공단 유치 노력

구미지역에 국가산업단지가 조성이 결정되자 단지건설 속도는 엄청나게 빨리 진행됐다.

구릉지와 야산이 빠른 속도로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공업물들이 들어서는 등 갑작스런 변화는 여러 어려운 문제들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지역민들은 구미에 산업단지가 조성되는 것에 대해 큰 기대를 가지면서도 대대로 지켜온 생활터전이 상실되는 것에 대한 불안감도 컸다.

산업단지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지역유지들은 이러한 주민들의 부정적인 생각을 바꾸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특히 지방공업개발장려지구 지정을 앞두고 용지매입 문제로 난항을 겪던 사안에 적극 개입해 공단측과 지역민의 갈등을 풀어내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사실 이 문제는 용지 매입가격도 모르는 가운데 단지 조성 설립에 동의하라는 것이어서 주민들의 양보와 희생이 꼭 필요한 것이었다.

이에 지역유지들은 추진위원회를 결성해 밤을 세워 주민들과 좌담회를 여는 등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단순히 용지 보상문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터전을 옮기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큰 문제였기에 해결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지역유지들로 구성된 추진위가 주민 한명한명을 찾아가 설득해 나가면서 원만한 합의를 이끌어 내면서 문제가 해결됐다.

이러한 지역유지들의 노력으로 지역민들은 구미공단 건설에 긍정적인 인식을 갖게 되었고, 경제 성장이라는 새로운 꿈을 갖게 됐다.

구미/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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