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과 함께한 구미공단 ⑥ 공단 근로자들을 위한 노력

▲ 2013년 산업유산으로 지정된 오운여상.

△ 기능근로자 수요 증가

구미공단의 산업활동이 가시화 됨에 따라 기능근로자 수요가 지속적으로 늘어나 공단 내 기능근로자양성소 설치 등 적극적인 수급대책이 절실히 요구됐다.

1973년 노동청이 집계한 지방 사무소 관하 23개 공업단지의 1973년 7월말 근로자 수는 1만6천여명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1976년까지 입주업체의 증가에 따라 20만7천명의 근로자가 확보돼야 했기에 3년간 11만1천여명의 새로운 인력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 같은 기능근로자 수요는 대부분 가발, 전자제품, 완구 및 선반 등의 분야에 집중됐다. 특히, 공업단지는 동일업종의 업체들이 많이 몰려있어 기능근로자 부족 현상이 야기될 경우 업체간 스카우트 과열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기능근로자양성소 설치가 이런저런 이유로 미뤄지면서 우려는 곧 현실이 됐다.

특히, 영세한 직물공장이 집단으로 들어서자 직공들을 구하기 힘들어지면서 하루가 멀다하고 이직자가 속출했다.

 

▲ 오운여상 입구에 붙어있는 현판.
▲ 오운여상 입구에 붙어있는 현판.

대부분 인근 회사에서 숙련공을 스카우트를 하면서 회사끼리 사이가 좋을리 없었다.

회사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다른 회사 직원들의 접촉을 하지 못하게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일이 반복되자 임금은 오르고 생산율은 떨어져만 갔다.

결국에는 건축한지 얼마되지 않은 공장을 팔겠다는 기업주까지 나왔다.

근본적인 기능근로자 수급대책이 절실했다. 기업들은 스스로 자체양성소를 만들어 필요한 인력을 수급해 나가는 방법을 선택했다.

 

▲ 오운여상 내부. /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 오운여상 내부. /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 기업들 직접 기술양성소를 짓다

공업단지관리청은 전국 주요 공업단지의 급증하는 전문 기능근로자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방안으로 1975년까지 노동청과 하브이해 마산, 창원지구 및 주안, 이리지구 등 3개소에 공공직업훈련소를 설치키로 했다.

당시 구미공단은 공단 인근에 기술계 학교가 많고, 대구 및 구미지역의 기존 공대, 공고 또는 전문기술학교에서 배출되는 졸업자로 부족한 인력을 충당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또 단순 기능근로자는 적령의 취업자에 대한 단기간의 자체훈련으로도 양성할 수 있어 각 공단 관리기간으로 하여금 취업희망자를 등록 시켜 입주기업체가 필요로 하는 인원을 선발할 수 있도록 기업체 스스로가 자체양성소를 통해 양성하도록 했다.

자체양성소를 갖추기 어려운 소규모 입주업체를 위해 각 공단별 단기양성소를 하나씩 설치하도록 했다. 구미공단은 전자공단이 1977년 초까지 설치토록 했다.

 

▲ 낙동강이 개발되면서 공단 근로자와 시민들에게 더욱 친숙한 휴식공간이 되고 있다. 사진은 구미시승마장.  /구미시 제공
▲ 낙동강이 개발되면서 공단 근로자와 시민들에게 더욱 친숙한 휴식공간이 되고 있다. 사진은 구미시승마장. /구미시 제공

△ 근대산업유산으로 지정된 오운여상

기업체가 직접 기술양성소를 갖추기 시작하면서 좀 더 체계적인 교육의 필요성이 요구되기 시작했다.

거기에 섬유업체에서는 대부분 어린 여자 직공들이 대부분이다보니 학교 교육에 대한 목마름도 거세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정부는 1977년 2월 28일 산업체 근로청소년의 교육을 위한 부설학교 설치 기준령(대통통령 제8426호)이 제정됐다.

그해 3월 1일부터 특별학급 및 산업체 부설학교를 설치 운영할 것을 각 기업체에 권장했고, 3월 16일 교육부령 제406호로 동령 시행 규칙이 제정됐다.

이에 구미공단에서는 코오롱과 동국방직이 각각 오운여상과 동국여고를 개교했다.

당시 코오롱 구미공장은 화학섬유 제조업체로 2천여명의 종업원이 종사하고 있었고, 그 중 중학교만 졸업한 여사원 중 90%이상이 고등학교 진학을 원했다.

이에 코오롱은 공장 내 교지 667평, 체육장 시설 690평을 마련하고, 난방시설을 갖춘 보통교실 4실, 특별교실 6실, 시청각실, 도서실, 음악실, 미술실, 상담실, 양호실 등의 시설을 갖춘 코오롱 부설 실업고등학교(1981년 오운여상으로 명칭 변경)를 1979년 3월 개교한다.

초대 교장은 당시 코오롱 대표이사였던 이상득 전 국회의원이 취임했다.

교감 1명, 교사 8명으로 어느 학교 못지 않은 교사진과 시설을 완비하고 신입생 280명이 입학했다. 입학생들에게는 재학 중 학비 전액을 무상으로 하고 전교생 기숙사 생활을 하도록 했다.

오운여상은 ‘참되게 배워 바르게 일하고 슬기롭게 살자’라는 교훈을 바탕으로, 가정과 사회에서 꼭 필요한 여성이 될 수 있는 교양과 지식을 교육했다. 이는 당시 코오롱 명예회장이던 오운 이원만 선생의 남다른 철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 오운여상 체육시간.
▲ 오운여상 체육시간.

이 명예회장은 오운여상 개교 당시 “여사원은 단순한 직원이 아니라 앞으로 이나라의 주부가 될 여성으로, 교양 있는 여성이 되도록 교육해야 한다”면서 서예와 수예 재봉, 꽃꽂이, 음식 조리, 예절 등의 교육에 각별한 신경을 쓸 것을 주문했다고 한다.

오운여상은 여성 직공들이 3교대 작업으로 체력적으로 힘든 상황에서도 교육에 대한 열망과 꿈을 위한 공간이었다.

이러한 오운여상도 시간이 흘러 개교 20년만인 2000년 2월 마지막 졸업생 24명을 배출하면서 역사의 뒤로 모습을 감췄다.

하지만 경상북도는 향토뿌리기업 및 산업유산 지정 사업을 펼치면서 2013년 오운여상을 근대산업유산으로 지정했다.

현재 오운여상 건물 입구에 산업유산 현판이 걸려있다.

당초 경북도와 구미시는 오운여상을 조극근대화 산업역사관으로 복원하고, 근대화 산업유산을 교육체험 관광자원으로 개발하려고 했으나, 여러 이유로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20년간 3천116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오운여상은 비록 폐교가 되긴 하였지만, 한국의 근대산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유산이기에 지금이라도 보존하고 그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 생산성을 올리기 위해 기업체에서 마련한 교육 프로그램에 참가한 근로자들의 모습.
▲ 생산성을 올리기 위해 기업체에서 마련한 교육 프로그램에 참가한 근로자들의 모습.

△ 낙동강은 근로자들의 안식처

구미공단이 급속도록 발전하면서 근로자 수도 급격하게 늘어났다.

공업화로 인한 인구 급증은 주택난이라는 심각한 문제까지 낳았다.

주택 보급이 인구 증가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돈이 있어도 셋방을 구하지 못할 정도가 됐다. 기업들이 기숙사를 만들기는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근로자들은 강 건너편에 있는 마을에서라도 숙식을 해야만 했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 출·퇴근 하는 근로자가 많을 수 밖에 없었다.

근로자들에게 낙동강은 출·퇴근을 힘들게 하는 요소이기도 했지만, 낙동강이 있었기에 구미공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주말이면 낙동강 나루에서 배를 타고 유희를 즐겼다. 당시 구미는 정주여건 등이 미비해 근로자들이 마땅히 쉴 곳이 없었기에 낙동강 둔치는 가장 인기있는 휴양지였다.

이후 1995년 지방자치 이후 정주여건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낙동강도 변하기 시작한다.

4대강 사업으로 한층 넓어진 낙동강 둔치를 체육공원으로 활용하는 등 다양한 프로젝트로 개발한 것이다.

특히, 구미시가 시민들의 레저와 관광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구미 7경6락 리버사이드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새로운 명소들이 생겨났다.

그 중에서도 구미승마장, 구미캠핑장, 낙동강 수상레포츠 체험센터 등은 구미의 새로운 관광명소로 자리매김 했다. 이러한 명소는 공단 근로자들에게도 큰 각광을 받고 있다.

구미/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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