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예천 천향리 천연기념물 석송령 노거수 <상>

재산을 가진 나무로 유명한 예천 천향리 석송령 노거수 .

과학적 논리로 증명할 수 없지만, 꿈의 영험함을 믿고 있다. 어머니로부터 이야기들은 태몽은 늘 내 삶에 영향을 끼쳤다. 때로는 내가 직접 꾼 꿈으로부터 그 영험함을 실감하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남들은 황당하다고 말할 때 ‘꿈같은 소리 하네.’라고 하면서 핀잔을 주지만, 지난밤 꿈이 상서롭거나 불길할 때면 그날은 늘 긴장하고 조심했다.

아무도 앞날의 일을 예측할 수 없는 우리의 삶에 꿈은 내게 특별한 예언으로 다가왔다. 지나고 나서 꿈풀이 해 보면 전부는 아닐지라도 예언이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어 놀랍기도 했다.

 

슬하에 자식 없어근심 많던 석평마을 이수목 씨
당산나무 아래 오침 중 ‘걱정말라’ 목소리 듣고
그 길로 군청 달려가 호적 올리고 전 재산 증여

100여년 지난 지금 6천248m² 토지·건물 소유
임대로 번 돈은 세금 내고 장학사업에 쓰는 등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 주민들 사랑 한 몸에

그런데 특별한 꿈으로 인하여 뜻밖에 횡재를 한 소나무 노거수가 예천군 감천면 천향리 804번지 마을 주민이 되어 부자로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마을 살림살이에 기부도 하고 학생들에게 장학금도 주는 등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궁금증은 하늘을 찔렀다.

한창 마을 나무 노거수를 식생 조사할 때이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2002년 봄이다. 아지랑이 피어나는 따뜻한 봄날, 계명대학교 식생조사팀과 함께 현장 조사를 위해 선바람에 꿈으로 대박 난 주인공이 사는 예천으로 향했다.

산세 좋고 물 맑은 예천은 예향의 고장이다. 예부터 성품이 온화한 주민들은 문향의 고장답게 어진 선비들이 많이 나온 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예천이 선비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학문을 숭상하는 선비들이 후학을 양성하는 데 게으르지 않았던 탓일 것이다.

석송령이 있는 천향리는 백두대간 옥녀봉에서 발원하는 석관천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석평, 샘발, 진발, 귀리, 베트리 등 5개의 자연부락으로 올망졸망 산자락과 하천 주변에 어우러져 있었다. 석송령은 역사적 유래와 함께 생동감으로 감동을 안겨 주었었다.

“이곳 석평마을 이수목(李秀睦)이라는 사람은 재산은 넉넉했으나 물려줄 슬하에 자식이 없어 근심이 많았다. 그는 문득 나무에 재산을 물려준다면 오랫동안 잘 지켜지리라는 생뚱맞은 생각을 했다. 그러던 중 마을 당산나무 그늘에서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다. 꿈에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 꿈에서 깬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게 바로 자신이 낮잠을 잘 수 있도록 그늘을 지워준 당산 소나무였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곧바로 군청으로 달려가 소나무를 자식이라 생각하고 석송령(石松靈)이란 이름을 지어 호적에 올렸다. 석송령(石松靈)은 석평마을에서 생명을 얻은 나무여서 석(石)씨의 성을 붙이고 영혼이 있는 소나무라는 뜻에서 소나무라는 송(松)과 신령하다는 영(靈)을 써서 석송령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리고 자신의 전 재산 5천87㎡ 토지를 등기까지 하여 물려주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석송령은 1928년부터 매년 재산이 증식되어 지금은 건물주란다. 10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재산이 늘어나 토지가 6천248m²나 되고 건물도 천향보건진료소, 마을회관, 만수당 등이 있다. 이를 소유한 석송령은 누가 뭐래도 부자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이런 미담을 전해 듣고 500만 원의 하사금을 보태어 주었다. 매년 임대료로 벌어들인 돈은 세금을 내고 나머지 돈은 금융기관에 예치하여 장학사업 등 어려운 마을 살림살이에도 보태주었다.

이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유래가 없는, 오늘날의 가진 자의 사회적 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실천운동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신문이나 방송에 오르내려 그 유명세로 마을의 품격을 높여주고 주민들에게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석송령 이름만큼이나 탄생의 설화도 재미있었다. “석송령이 마을에 자리 잡은 건 700여 년 전이다. 당시 영주 풍기 지역에 큰 홍수가 나서 마을 앞 석관천에 온갖 잡동사니가 떠내려왔다. 그 가운데 뿌리째 뽑힌 한 그루의 소나무가 떠내려 오는 것을 본 주민이 나무의 운명을 안타까워하며 건져내 개울 옆에 심은 것이 시작이었다.”

 

이러한 애틋한 식목담(植木談)만큼이나 나무를 보호하고 가꾸어 왔을 것이 분명하다. 그때부터 소나무는 마을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마을 수호신 나무로 자리매김했다. 소나무는 마을 주민에 의해 이름과 재산도 얻고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다. 반면에 마을 주민은 소나무로부터 마을의 단합, 평화에 이어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마을 주민과 석송령은 마치 한 몸체가 된 것처럼 더불어 살아가고 있었다.

석송령 노거수에 대한 설화를 보면 조상의 지혜로움이 잘 나타나 있다. “일본 강점기 때의 일이다. 일본 순사(巡査)가 석송령을 제거하여 대한제국의 민족정기를 말살하고, 일본 군함 건조 재료로 사용하고자 했다. 순사는 인부를 동원하여 나무를 베려고 자전거를 타고 석송령 부근의 개울을 건너오다 갑자기 자전거 핸들이 뚝 부러져 넘어지면서 목이 부러져 죽고 말았다. 인부들은 노거수의 거대하고 우람한 모습에 놀라 영험한 나무라 믿고 겁에 질려 달아났다고 한다.”

이때는 이미 마을 주민들이 송계(松契)를 조직하여 나무를 보호하고 있을 때였다. 석송령을 해치려 일본 순사가 온다는 것을 미리 알고 주민들이 사전에 어떤 방법으로든지 이를 막기 위하여 준비하지 않았을까? 일본 순사의 죽음이 단순 우연의 사고일까? 그러하지 않다는 의심이 강하게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국법은 무너져 있고 약육강식의 지배사회에서 마을의 질서와 평화의 구심점이 된 송계의 주인공 석송령을 해치려 하는데 가만히 두고만 보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부귀, 장수, 상록을 상징하고 있는 석송령 노거수가 마을을 수호해 주고 있다고 믿고 있다. 석송령에서 매년 정월 대보름날 새벽에 주민들은 한 해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낸다. 마을 제사가 끝나면 마을 사람들은 막걸리를 들고 나무의 주변을 돌면서 술을 대접한다.

이러한 민속문화는 나무를 보호하고 사랑하는 행동으로 이어지고, 나아가서는 석평마을의 단합과 발전으로 평화로운 마을 건설에 밑바탕이 되었다. 특히 마을 제사를 지낼 때 쓰는 하얀 고깔을 가져다 태워서 아들 없는 사람이 먹으면 아들을 낳고, 공부하는 학생이 먹으면 공부를 잘한다고 하여 마을 제사를 지낼 때는 고깔을 가지려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석송령 노거수에 더 많은 미담이 입혀져 마을 주민들과 함께 천대 만대 만수무강하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해 본다.

늘 푸른 기상을 지닌 한민족의 표상 소나무는

육송(陸松), 적송(赤松), Red Pine은 수형이 곧고 수피는 붉은색을 띠고 있다. 금강송, 강송, 춘양목이라고 부른다. 해송(海松), 흑송(黑松), Black Pine은 수피가 흑갈색이며 동아는 흰색을 띠고 있다. 모두 상록 침엽교목이다. 송(松)은 나무 목(木)에 벼슬을 뜻하는 공(公)을 붙여 벼슬을 해도 좋을 만큼 훌륭한 나무라는 의미도 있다. 하나의 인격체로 생각해 궁궐 복원을 위해 소나무를 벨 때도 반드시 예를 갖추어 ‘어명이요’를 세 번 알리고 나서야 톱을 댄다. 속리산 정이품송은 나라로부터 벼슬을 하사 받았고, 예천 석송령은 재산을 상속받았다.

/글·사진=장은재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