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길 위에서
이란 ⑤

▲ 세상 모든 아기들과 마찬가지로 이란의 아기들도 순박하고 귀엽다.
▲ 세상 모든 아기들과 마찬가지로 이란의 아기들도 순박하고 귀엽다.
결혼을 하지 못한 기자는 아이가 없다. 그렇지만 세상 모든 아이가 귀엽고 예쁘고 소중하게 느껴지는 건 기혼자와 다르지 않다. 한국의 아이들은 물론이고, 유럽과 동남아시아, 중동의 아이들 모두가 마찬가지다.

“히잡이 번거롭고 귀찮아요” 대담한 이란 소녀들
수줍은 표정으로 사진을 찍고 이별을 슬퍼하는 아이들
`위험한 나라 속 아이들` 천진한 눈망울 잊지못해


맑은 빛으로 반짝이는 그네들의 눈동자 속에는 세상사 때 묻은 탁함이 보이지 않는다. 때로는 그 눈망울이 혼탁한 세계에서 지리멸렬하게 살아가는 기자를 가르친다. 선인들의 말처럼 아이는 어른의 스승이다.

이란과 러시아 사이에 자리한 카스피해는 지구 위에서 가장 큰 호수다.

규모로 보자면 호수라기보다는 바다에 가깝다. 바로 그 카스피해가 지척인 해변도시 반다르 안잘리에서 명랑한 열여섯 이란 소녀 둘을 만났다. 가족들과 소풍을 왔다고 했다.
 

▲ 이란을 여행하며 마주친 거대한 고성(古城). 건축양식이 독특하고 매력적이다
▲ 이란을 여행하며 마주친 거대한 고성(古城). 건축양식이 독특하고 매력적이다
사촌지간이라는 두 소녀는 이슬람국가에 사는 아이들답지 않게 대담하게도 “우리는 히잡 쓰는 게 번거롭고 귀찮아요”라며 검은 스카프 밑 머리카락을 불어오는 바람 앞에 잠시잠깐 드러내기까지 했다.

그 장면을 본 소녀의 엄마는 눈앞에서 폭탄테러처럼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 듯 놀라며 둘을 야단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이들은 엄마의 시선을 피해 까불대며 히잡 벗은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달라는 맹랑한 부탁까지 했다.

대중이 이용하는 장소에서 히잡을 벗는 행위와 그걸 사진으로 찍는 건 `무슬림 근본주의 국가`에선 분명한 범죄임에도 소녀들은 거침이 없었다.

 

▲ 페르세폴리스에 세워진 거대한 조형물과 열주(列柱)들.
▲ 페르세폴리스에 세워진 거대한 조형물과 열주(列柱)들.

이란 바깥의 세상이 궁금해 영어를 공부하고 있다는 그네들은 오랜 시간 이란을 `테러를 지원하는 불량국가`라고 단정하며, 각종 정치·경제제재를 가해온 미국에서 활동하는 여자 가수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레이디 가가를 좋아한다고 했다.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열대여섯 살 아이라면 부모와 교사들 몰래 숨어서 본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예쁜 여가수의 춤과 화장법을 따라하고 싶은 일탈욕구가 왜 없겠는가.

아름답고자 하는 젊은 여성들의 욕망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종교적 도그마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 지키도록 강요된 수천수만 가지의 이슬람식 규범 안에서도 이란 소녀들은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갑갑한 현실에서의 일탈을 감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 이슬람 통치자 아야톨라 호메이니의 얼굴이 그려진 이란의 지폐.
▲ 이슬람 통치자 아야톨라 호메이니의 얼굴이 그려진 이란의 지폐.

남녀와 노소를 구분하지 않는 이란 사람들의 현실 탈출 욕구.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외엔 뾰족한 도움을 줄 수 없었던 기자는 그저 이란 사람들이 지금보다는 조금 더 확장된 자유와 개성존중의 풍토 속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했을 뿐이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의 걱정 속에서 이런저런 문화충격을 받으며 시작한 이란 여행. 하지만, 그 우려를 불식하고 이란 사람들의 선량함과 매력적인 풍경에 익숙해져 즐거움을 느끼기까지의 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짧았다. 지금도 기억이란 소프트웨어 속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이란의 풍광들.

황량한 바위산 아래 무더기로 피어 방랑자의 심란함을 위로해준 붉디붉은 양귀비꽃, 끝없이 펼쳐지던 광대한 사막, 해질녘 푸르스름한 빛을 반사하며 보석처럼 빛나던 모스크의 벽과 지붕, 페르시아 왕조 부침(浮沈)의 역사를 긴 설명 없이 한눈에 보여주는 거대한 무덤 낙쉐 로스탐, 카스피해를 바라보며 한가로이 낚시를 즐기던 흰 수염 근사한 할아버지, 사막도시 야즈드를 뒤덮은 수백 채에 이르는 진흙집들, 실크로드를 오가던 상인들의 숙소 `카라반 사라이(caravan sarai)` 옥상에 누워 바라보던 커다란 별들, 매혹적인 보랏빛으로 반짝이는 우르미예의 소금호수….

이란에서 기자가 만났던 갖가지 세상 풍경은 “쓸쓸하고 외로운 것들도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삶의 진실을 다시 한 번 고개 끄덕여 깨닫게 했다. 아름다운 풍광에 더해 이란에서 만난 아이들의 천진한 눈망울도 쉽게 잊지 못할 것이다.

 

▲ 이란-터키 접경에서 만난 쿠르드족 아이들.
▲ 이란-터키 접경에서 만난 쿠르드족 아이들.

소풍 나온 공원에서 자기 몫의 음료수와 샌드위치를 처음 보는 한국 아저씨(?)에게 나눠주던 여섯 살 알리, “함께 사진 한 장 찍어도 괜찮겠느냐”고 청하니 부끄러워하면서도 포즈를 취해주던 어린 남매, 같이 보낸 30분 남짓한 시간에 정이 들어 기자의 품에서 떨어지려하지 않던 모하메드, 장애를 가진 부모 밑에서 태어났음에도 표정에서 그늘이 느껴지지 않아 더욱 슬프게 보였던 또 다른 남매까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국을 포함한 서방세계는 시시때때로 “이란의 주요 군사시설을 폭격하겠다”는 엄포를 놓곤 했다. “테러리스트를 감싸고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려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에 관한 정치적 논평이나 견해를 내놓는 건 기자의 몫이 아닐 듯하다. 그러나, 이 말만은 꼭 하고 싶다.

지구 위 어느 민족보다 착하고 순진한 이란 사람들, 어떠한 죄도 읽어낼 수 없는 선량한 눈빛의 이란 아이들. 그들이 조용하고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앞으로도 오래오래 웃으며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 이건 신을 믿지 않는 기자가 해본 거의 유일한 진심어린 기도다.

 

▲ 내부로 바람이 오가는 통로를 만들어놓은 독특한 야즈드의 건물.
▲ 내부로 바람이 오가는 통로를 만들어놓은 독특한 야즈드의 건물.

다시 세월이 지나 이란을 찾았을 때도 알리, 후세인, 모하메드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들과 청년들, 아저씨, 할아버지와 어깨를 걸고 애틋한 정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종교적 독단과 정치적 음모도 이란 사람들의 평화로운 일상과 단란한 가정을 파괴할 권리는 없다. 이란을 여행하며 기자가 만난 100여 명의 후세인과 알리 그리고, 모하메드 역시 이를 대놓고 말하지 않을 뿐, 그 명백한 진리를 모를 리 없을 것이다.

인간이 삶을 영위한다는 건 자신의 마음에 흡족하건, 때로는 그렇지 않건 세상과 관계를 맺어가는 것과 다름없다. 살아간다는 것이 갑갑하고 서글퍼지는 날들이 있다. 복잡하게 짜인 사회관계망 속에서 환멸을 느낄 때도 있다. 한국사회에서 직장인으로 살고 있다면 누구나 겪게 되는 감정들.

그럴 때면 기자는 이란 사람들의 순수한 미소를 떠올리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언젠가 우리도 그들처럼 `살아있음`을 축복으로 여기며 환하게 웃을 수 있는 날들이 오지 않겠는가.

▲ 차도르를 입은 엄마 곁에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기자를 바라보는 이란의 꼬마숙녀.
▲ 차도르를 입은 엄마 곁에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기자를 바라보는 이란의 꼬마숙녀.
아름다운 추억 선물한 쿠르드족

터키 동부와 이란, 이라크 북부와 시리아 등지에 흩어져 사는 쿠르드족은 3천만 명에 가까운 인구와 자기들만의 언어를 지녔음에도 국가를 가지지 못한 슬픈 운명의 사람들이다.

중세부터 시작된 쿠르드족 불행의 역사는 뿌리가 깊다. 불과 몇 십 년 전엔 이라크에서 벌어진 화학무기에 의한 대량학살의 피해자였고, 이란에서의 독립국가 건설운동도 비극적으로 끝이 났다. 터키를 상대로 진행 중인 무장저항운동은 아직도 현재진행형.

터키 동북부와 이란을 여행했을 때 이들 쿠르드족과 자주 만났다. “수니파 무슬림이 다수를 이루는 호전적인 민족”이란 평가를 듣고 있는 쿠르드족. 그러나, 기자가 만난 그들은 `호전`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너무 순박하고 선량해서 동정심을 자극할 정도였다.

 

▲ 왕들의 무덤 낙쉐 로스탐은 석산을 깎아 만들었다. 거기에 새겨진 거대한 부조.
▲ 왕들의 무덤 낙쉐 로스탐은 석산을 깎아 만들었다. 거기에 새겨진 거대한 부조.

성경 속 `노아의 방주`가 발견됐다는 아라라트 산이 위치한 도우베야짓, 광대한 소금호수가 절경인 도시 반(Van), 이란과 아르메니아의 접경인 우르미예에서 만난 쿠르드족 노인과 청년, 그리고 아이들.

터키 군대의 폭격에 12명의 쿠르드족이 목숨을 잃은 날. 도우베야짓에서 벌어진 항의시위 현장을 지켜봤다. 말없이 눈물을 흘리는 할머니들과 자신들이 처한 불합리한 상황에 분노하던 젊은이들. 인종문제가 불러온 불행의 상처는 깊었다. 하지만, 그 상처가 쿠르드족의 성품까지 파괴하지는 못한 듯했다.

그날, 여행자인 기자의 안전을 걱정해 택시를 태워 시내 외곽으로 데려다준 것은 터키 군인이 아닌 쿠르드족 청년들이었다. 반 호숫가에서 만난 쿠르드족 학생들 또한 그들의 소풍에 기꺼이 낯선 사람을 초대해 닭 가슴살 바비큐를 듬뿍 내놓으며 웃었다.

우르미예의 한적한 공원에서 기자가 마신 홍차 값을 대신 치른 것도 쿠르드족 할아버지였다. 그는 먼 나라에서 온 동양인 사내가 자신의 시야에서 온전히 사라질 때까지 오래오래 손을 흔들어주었다. 마치 외지로 떠나는 친아들을 송별하듯. 독립된 자기들의 나라에서 싸움을 모르는 순한 양처럼 살아야 할 사람들이 겪는 슬픔.

이란 여행을 끝낸 지 벌써 몇 해가 지났지만, 지금도 쿠르드족을 떠올릴 때면 마음 한구석이 아프게 서늘해진다. 아직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쿠르드족의 현실. 그들이 미래를 꿈꿀 희망만은 강탈당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사진제공/류태규

홍성식 기자/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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