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길 위에서
오스트리아 ①

▲ 오스트리아의 잘츠브르크 정경. 평화롭고 정겹게 보인다.

`놀라움`이라는 감정은 익숙하지 않은 것을 만났을 때 온다. 그것이 예술작품일 경우 이 놀라움은 경악 혹은, 정신적 공황상태로까지 이어지기도 하는데 그걸 `스탕달 신드롬`(Stendhal Syndrome)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 스탕달 신드롬이 반 고흐(1853~1890)나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의 그림이 아닌 겨우 `도시의 건축물`을 보고도 느껴질 수 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몇 해 전이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에 머물던 일주일은 행복했다. 그해 5월 터키여행 중 만난 친절한 선배는 고맙게도 자신이 살고 있는 비엔나의 조그마한 아파트를 아무런 대가 없이 통째로 빌려주었다.

동유럽을 여행 중이던 카이스트 여학생 3명과 기자는 그곳에서 오랜만에 한국 음식을 요리해 먹고, 편안한 잠을 잤다. 한국어로 실컷 수다를 떨며 여행자의 외로움을 달랠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와 비엔나는 클래식 음악의 거장 모차르트와 하이든, 슈베르트가 태어난 나라이며, 수백 년 동안 사랑받아온 그림인 `키스`의 구스타프 클림트, `추기경과 수녀`의 에곤 실레가 활동했던 도시다.

세계를 들었다 놓았다 했던 음악가과 미술가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고, 거리에 침을 뱉거나 전철에서 큰소리로 떠드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매우 힘든 도시.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매너는 기자가 여행해본 유럽 국가 중 최고였다.

비엔나에서의 일주일. 느지막이 아침을 챙겨 먹은 후 교외선 전철을 타고 나가 시 외곽 강변을 느린 걸음으로 산책하거나, 시내 중심가 노천카페에서 `비엔나커피`를 마시며 눈앞에서 펼쳐지는 길거리 연주회와 다채로운 공연에 무심한 눈길을 던지며 유유자적했다.

사실 사람의 나이가 40세쯤 되면 어지간한 것에는 감동하기가 힘든 법이다. `미술관의 도시`라 불리는 비엔나이니 왜 그림을 보러 가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미술에 관해선 문외한인 탓일까? 루벤스나 클림트의 그림을 봐도 별다른 감흥이 일어나지 않았다. 우습게 들리겠지만, 깜짝 놀라 발걸음을 멈춘 공간은 미술관인 아닌 비엔나의 `거리`였다.

▲ 비엔나를 상징하는 건물 슈테판성당.
▲ 비엔나를 상징하는 건물 슈테판성당.
▲ 한국과는 전혀 다른 도시 풍경

“한국의 도시는 콘크리트와 통유리로 축조된 살벌한 공간”이라고 말한다면 누군가 펄쩍 뛰며 이를 반박할까?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고가의 주상복합아파트와 랜드마크 역할을 하는 수십 층 마천루(摩天樓)를 보자. 세칭 `잘 먹고 잘 사는` 몇몇 부촌을 벗어나면 콘크리트와 통유리는 가난한 자들의 눈물로 대체된다.

한국에는 판자로 이어붙인 철거 직전의 빈민촌들이 불과 얼마 전까지 존재했다.

바로 그런 도시인 서울에서 20년 가까이 살아본 기자는 부러웠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예술적인` 건축물이.

피 뜨거운 열아홉 살 세르비아계 보스니아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 Princip·1895~1918)가 망하게 만든 합스부르크 왕가. 오스트리아와 독일, 거기에 헝가리와 슬로바키아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던 페르디난트 황태자의 갑작스런 죽음은 `세계 제1차대전`을 불렀고, 패배한 합스부르크가는 대(代)가 끊겼다. 이건 역사책을 읽으면 다 나오는 이야기이니 이쯤에서 그만두고.

오스트리아를 여행한 그해 여름. 바로 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숨결이 곳곳에 묻어있는 거리와 궁전을 부지런히 쏘다녔다. 그리고는 어쩔 수 없는 열패감과 부러움에 시달렸다. 모두가 알고 있고 그렇기에 비엔나를 찾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방문하게 되는 슈테판성당과 국립 오페라하우스, 쇤부른 궁전과 벨베데레 궁전만이 아니었다.

비엔나 도심에 있는 시청 건물은 물론 국회의사당까지 멋들어지기 짝이 없었다. 의사당 분수에 석회암을 깎아 만든 조각상은 그 표정 하나하나가 진짜 사람처럼 섬세했고, 지붕 위의 조각된 마차는 당장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듯했다.

앞서 언급한 `스탕당 신드롬`과 유사한 감정이 기자를 흔들었다. 시청사의 첨탑 역시 고딕미술의 절정을 과시하고, 심지어 쓰레기소각장까지 모던한 예술품 같았다.

▲ 꽃과 나무가 아름답게 정돈된 미라벨 정원.
▲ 꽃과 나무가 아름답게 정돈된 미라벨 정원.
▲ `저녁이 있는 삶`을 즐기는 비엔나 사람들

살풍경한 콘크리트 더미에서 살아온 `한국 촌놈`은 맥이 탁 풀렸다.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가장 유명한 두 여자, 마리아 테레지아와 그녀의 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가 살았던 쇤브른 궁전의 정원에 이르러선 부러움을 넘어 감동까지 먹었다.

사실 기자는 오래 전 지어진 성당이나 궁전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기보다는 그걸 짓기 위해 흘려야했던 핍박받는 이들의 땀과 눈물을 먼저 떠올리는 `멋없는 인간`이다. 천성이 낭만주의자보다는 설익은 민중주의자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은 평소와 달랐다. 심지어 프랑스 왕과 결혼해 1789년 프랑스혁명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온 매춘부”라 조롱받았던 마리 앙투아네트가 불쌍하다고 느꼈으니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건 대체 무슨 감정의 뜬금없는 기복이었을까싶다.

비엔나에 머물던 그때. 주말 밤엔 시청사 벽면에 거대한 스크린을 걸고 상영하는 야외 오페라를 관람했다. 왜 오스트리아에서 우리가 `클래식`이라 부르는 대부분의 음악이 탄생했는지 짐작이 갔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였음에도 자신의 사연을 떠드는 이 하나 없이 모두가 숨죽인 채 벽면에 투사되는 오페라에 집중하는 장면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장관이었다.

비단 비엔나의 외양만은 아니었다. 도시 속에 담긴 내용은 더 근사했다. 필요 없는 쓰레기를 태우는 공간조차 예술작품처럼 아름답게 만든 비엔나 사람들은 오후 6시만 되면 슈퍼마켓과 담배 가게, 채소 가게, 공장과 사무실을 모조리 닫고 가족들과의 시간을 즐긴다. 이른바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리는 것이다.

오스트리아는…

유럽 대륙 중심에 위치한 내륙국이다.

정식 명칭은 오스트리아공화국(Republic of Austria). 13세기 말부터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하기 시작했다.

1815년 독일연방,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1918년 공화국을 거쳐 1938년에는 독일에 합방됐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던 1945년 구 소련의 점령을 거쳐 1955년에 주권을 회복한 나라다.

북측으로는 독일·체코와 국경을 접하고 있고, 동쪽으로 헝가리·슬로바키아와 접경이다. 남쪽엔 슬로베니아·이탈리아, 서쪽에는 스위스와 리히텐슈타인이 위치하고 있다.

▲ 마치 동화 속 장면을 보는듯한 착각을 부르는 비엔나의 건축물.
▲ 마치 동화 속 장면을 보는듯한 착각을 부르는 비엔나의 건축물.
`영세중립국`이며 헌법에 영속적 중립성을 명시하고 있다.

면적은 8만3천871㎢이고, 내륙국의 특성상 어느 곳을 가도 바다는 볼 수 없다. 수도는 비엔나. 인구는 850만 명으로 180만 명 가량이 비엔나에서 생활한다. 오스트리아인(91.1%)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며, 유고슬라비아인(4%)과 소수의 터키인(1.6%), 동양인 등이 함께 거주한다.

평균수명은 79세. 공용어로는 독일어를 사용하며 70% 이상의 국민이 가톨릭교도다. 소수의 무슬림과 개신교도도 존재한다.

사용하는 화폐는 유로(Euro). 1유로는 한국 돈 약 1천260원(2106년 12월 기준)이다.

다수의 유럽 사람들이 그렇지만, 오스트리아인들의 준법정신과 공동체의식은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높다. 공공장소에서 시끄럽게 떠들거나 타인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어른은 물론, 아이들도 보기 힘들다.

한국과는 1963년 외교관계를 맺었다. 1970년 사증면제 협정이 체결됐고, 1971년에는 무역 협정이, 1979년에는 항공 협정이 체결됐다.

▲ 오스트리아의 근사한 건축물 사이를 지나다니는 마차.
▲ 오스트리아의 근사한 건축물 사이를 지나다니는 마차.
한국의 대 오스트리아 수출액은 8억8천200만 달러(2015년 기준). 한국은 오스트리아에 반도체와 휴대전화 등을 수출하고, 자동차부품과 재생섬유 등을 오스트리아로부터 수입한다.

오스트리아는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깨끗하게 잘 관리된 도시환경을 갖춰 많은 여행자들이 선호하는 나라다. 동시에 상대방을 배려하는 서구식 매너가 몸에 배인 국민들이 있기에 여행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도 큰 어려움 없이 도시와 시골 곳곳을 돌아볼 수 있다.

낯선 곳에서 길을 잃었거나, 맛있는 현지 음식이 궁금하다면 고민하지 말고 오스트리아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된다.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은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환한 웃음으로 여행자의 어려움을 해결해주려 노력할 것이다.

사진제공/안찬규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관련기사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