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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륜사, 그 옛날 모습은 사라졌지만…

등록일 2017-05-25   게재일 2017-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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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차돈 순교와 불교왕국의 태동 (3)
6세기 `왕의 사찰`로 불렸던 흥륜사
9년간 공사로 신라 대표 대가람 탄생
조선시대 화재로 소실돼 배례석만 남아

   
▲ 1천500여 년 전 `왕의 사찰`로 불렸던 흥륜사를 작가의 상상력으로 복원시켰다. 법흥왕 당시에도 `경주의 상징`으로 불리는 소나무는 무성했을 것이다. 소나무 숲 안에 웅장하게 자리 잡은 절의 모습을 그렸다.

삽화/이건욱
 

동네 주민들에게 물어물어 어렵게 찾아갔으나 어디에도 왕이 거닐었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황사로 뿌연 하늘 아래 미지근하고 쓸쓸한 바람이 불어올 뿐이었다.

경주시 사정동 옛 흥륜사터에 지어진 조그만 절.

대웅전과 석등, 범종(梵鐘)과 이차돈 순교비를 모사(模寫)한 비석만이 이곳이 6세기 무렵 `왕의 사찰`로 불렸던 흥륜사(興輪寺)가 있던 자리임을 추측케 했다. 방문객이라곤 기자 하나가 전부였다.

이차돈의 순교 이후 법흥왕과 진흥왕에 의해 증축·재건된 흥륜사는 명실공히 신라를 대표하는 대가람(大伽藍·규모가 크고 불력을 인정받은 절)이 된다. 흥륜사가 거대 사찰로 변신을 시작한 시기는 535년(법흥왕 22년)으로 추정된다.

사학자 김태형의 논문 `이차돈 순교유적과 유물에 대한 고찰`에 따르면 법흥왕이 첫 삽을 뜬 흥륜사 재건은 조카인 진흥왕 재위 5년(544년)에 이르러서야 완성된다. 자그마치 9년 동안 진행된 대공사였고, `불국정토 신라 건설`이라는 백부 법흥왕의 뜻을 이어받은 진흥왕의 의지가 없었다면 이루지 못했을 프로젝트였다.

 

  ▲ 세월이 흘러 흥륜사가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터에 새롭게 지은 사찰. 모조품 `이차돈 순교비`와 석등, 범종, 대웅전 등이 보인다.  <br /><br />사진/이용선기자  
▲ 세월이 흘러 흥륜사가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터에 새롭게 지은 사찰. 모조품 `이차돈 순교비`와 석등, 범종, 대웅전 등이 보인다.

사진/이용선기자

진흥왕은 법흥왕 이상으로 불심이 깊었던 인물로 여러 역사서에 기록돼 있다. 진흥왕 또한 큰아버지 법흥왕과 마찬가지로 말년엔 왕의 권위와 권력을 망설임 없이 버리고 승려가 된다.

진흥왕의 법명은 법운(法雲). 흥륜사는 전직 왕인 법운이 주지로 있던 절이었다. 그러했으니, 당대 신라에서 흥륜사가 가지는 위상이 얼마나 높았는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는 스물한 살 젊은이 이차돈의 죽음이 새롭게 탄생시킨 사찰 흥륜사.



▲국가와 신라왕실 복을 빌고 재앙 물리친 사찰



보각국사 일연의 `삼국유사`와 한국불교연구원이 간행한 `신라의 폐사(廢寺)` 등에 따르면 흥륜사는 불교를 전하러 신라에 온 승려 아도(阿道)가 창건한 절이라 전해진다. 세워진 시기에 관해서는 학설이 엇갈리고 있으나, 통상은 눌지왕(재위 417~458년) 때라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처음에 지어진 흥륜사는 보잘것없는 규모의 초라한 사찰이었다. 앞서도 언급됐지만 흥륜사가 신라 최고의 가람으로 모습을 바꾼 계기는 이차돈의 순교였다. 법흥왕 14년에 이차돈이 “신라는 불교를 공인해야 한다”며 흰 피를 흘리고 죽자 관료와 백성들은 그 기적에 놀라며 청년의 죽음을 슬퍼한다.

법흥왕은 이차돈을 기리기 위해 흥륜사의 증축과 재건을 명령했고, 진흥왕 때 완성된 절을 신라 사람들은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라 불렀다. 여기서는 불교와 관련된 각종 집회가 열렸고, 국가와 신라왕실의 복을 비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흥륜사에는 선덕여왕 때 승상을 지낸 김양도가 봉안한 미륵삼존불상이 있었고, 신라십성(新羅十聖)을 표현한 벽화도 그려졌다고 전해진다. `왕의 사찰`로 이름이 높았을 때는 황룡사(皇龍寺), 사천왕사(四天王寺)와 더불어 신라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이란 언제나 무심한 것. 번창하던 흥륜사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화재로 소실됐다. 석조 배례석(拜禮石) 정도만이 남아 그 터에 신라의 대가람이 있었음을 증명해줬다. 1972년과 1977년에는 흥륜사에 대한 발굴 작업이 진행되기도 했다.

동국대학교 이봉춘 명예교수는 `흥륜사와 이차돈의 순교`라는 논문에서 흥륜사의 역사적 위상을 아래와 같이 정의한다.

“한국 불교사에서 신라시대 불교는 유독 긴장과 탄력의 역동적인 역사과정을 보여준다. 신라불교를 논할 때 대부분 가장 먼저 언급하게 되는 것이 흥륜사와 이차돈 문제다. 신라 최초의 국영 사찰인 흥륜사 창건과 관련하여 이차돈의 순교가 있었고, 이를 계기로 불교가 공인됨으로써 비로소 본격적인 신라불교 활동이 전개된다.”

 

  ▲ 6세기 무렵의 신라 토기. 균형감과 절제미가 당시 신라인의 예술적 감각을 짐작하게 해준다.  
▲ 6세기 무렵의 신라 토기. 균형감과 절제미가 당시 신라인의 예술적 감각을 짐작하게 해준다.



▲ 이차돈과 법흥왕의 기억과 함께 할 흥륜사



시간은 세상사 대부분의 것들을 모래먼지처럼 허무하게 사라지게 한다. 2명의 왕이 머물렀던 대사찰 흥륜사도 마찬가지였다. 신라인의 예술적 감각이 그대로 반영됐을 대웅전과 불탑 등은 1500년이란 세월을 견뎌내지 못했다. 시간에 저항할 수 있는 인간과 사물은 극히 드물다.

그러나, 프랑스의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1884~1962)의 말처럼 `형상`이 사라졌다고 해서 `정신`과 `기억`까지 소멸되는 건 아닐 터.

신라의 역사를 기록한 적지 않은 책과 신라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사람들의 핏속으로 이어져온 유전적 기억 속에서는 아직도 흥륜사가 또렷하게 남아있다. `정신`을 버리지 않은 사람이라면 비 내리는 흐린 날 흥륜사 뒤편 소나무 숲길을 산책하는 법흥왕과 이차돈, 진흥왕을 느낄 수도 있다.

세명대학교 이창식 교수는 이차돈의 순교가 가져온 신라불교의 번성과 흥륜사의 미래 모습을 아래와 같은 문학적 문장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차돈은 신라에 불교를 뿌리 내리고자 자신의 한 몸을 미련 없이 버렸다. `화엄경`에 새겨진 글귀 `꽃과 강을 버릴 때 열매와 바다를 본다`는 진리를 몸소 증거한 것이다.

이차돈의 희생적 이타행(利他行)은 통일신라를 거치며 화려한 불교문화로 승화되었고, 부처의 가르침은 호국불교 발상으로 신라정신과 민족정신의 근간이 됐다. 흥륜사는 상생불교의 대표 산실로 부각되어야 한다.”

이 교수의 진술을 떠올리며 사정동 흥륜사터에 지어진 새로운 절의 돌계단에 한참을 앉아있었다. 1500년 전 신라, 불법, 순교, 왕의 사찰, 시간의 흐름 속에 덧없이 사라진 것들…. 이런 단어가 불규칙한 연상 작용으로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 와중에 현실인 듯 꿈인 듯 이차돈의 어깨를 다정하게 두드리는 법흥왕과 그 모습을 감동어린 눈길로 바라보는 진흥왕의 웃음을 본 것도 같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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