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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문·비난에 얼룩진 신라 마지막 여왕 진성, 그 빛과 그림자

등록일 2018-07-19   게재일 2018-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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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의 여인들 ④

   
▲ 2018년 경주의 해 질 무렵. 1천130년 전 신라는 사진 속 붉은 석양처럼 사그라들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1천130년 전인 아득한 옛날 서라벌. 신라의 궁궐에서 시작된 소문이 저잣거리를 술렁이게 했다. 이런 내용이었다.

“여왕이 자기 아버지의 동생인 숙부 위홍(魏弘)과 추문을 일으키더니, 그가 죽고 나서도 음심(淫心)을 참지 못하고 젊고 잘생긴 사내들을 궁으로 불러들여 밤마다 주지육림(酒池肉林)의 잔치를 벌이고 있다. 이 나라 미래가 어찌될 것인지….”

이뿐 아니었다. 세간을 휩쓰는 풍문 중에는 아래와 같은 것들도 있었다.

“여자가 왕에 오르고 나서 해괴한 일이 자꾸 일어난다. 사철 솟구치던 우물이 마르고, 하늘은 작년에 이어 올해도 비를 내려주지 않고 있다. 각처에서 도적이 들끓고, 조정(朝廷)의 충신은 씨가 말라 간신만이 활개치고 있다.”

이처럼 맹렬한 공격과 원망의 대상이 된 사람은 신라, 아니 한국 봉건시대의 마지막 여왕인 진성(재위 887~897)이었다.

“음란한 것은 물론, 정치 감각도 없었다”는 꼬리표는 진성여왕을 따라다니는 어두운 그림자다. 그런데 그건 공론(空論)에 불과했을까? 아니면 진실일까?


가뭄·홍수로 고통받는 백성 위해
즉위 즉시 조세면제 정책 펼치고
어려운 백성 직접 돌보기도
이미 국가통제력 상실된 신라말기
진성의 정치력으로는 통제불가


◆ 아버지와 오빠 둘에 이어 왕좌에 오르다

먼저 그녀가 어떤 경로를 통해 여왕의 자리에 오른 것인지 살펴보자.

진성여왕의 아버지인 경문왕은 ‘왕의 직계 혈통’이 아니었다. 그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장인 헌안왕의 유언 때문. ‘삼국사기’에 따르면 죽음을 앞둔 헌안왕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과인은 불행히도 아들이 없고 딸만 있다. 옛날 선덕과 진덕 두 여자 임금이 있었으나, 이는 암탉이 새벽을 알리는 것과 유사하므로 본받을 일이 될 수 없다. 나의 사위 응렴(膺廉·경문왕)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성숙한 덕을 갖추었으니, 경들은 그를 왕으로 세워 섬기라. 그러면 훌륭한 왕업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왕이 될 수 있는 사람’에서 여성을 배제한 헌안왕과 달리 경문왕의 아들이었던 정강왕은 요즘 말로 하면 ‘페미니스트(Feminist)’의 면모를 보인다.

역시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진술을 통해서 이를 알 수 있다.

  ▲ 9세기 말 서라벌의 백성들은 가뭄과 재이 등으로 많은 고통을 받았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 9세기 말 서라벌의 백성들은 가뭄과 재이 등으로 많은 고통을 받았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나의 병이 위중하니 이제 다시 정치 일선에 나서기가 힘들 것이다. 그런데 내겐 왕위를 이을 자식이 없다. 누이 만(曼·진성여왕)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그 뼈대가 남자를 능가하니, 그대들은 선덕과 진덕의 옛 일을 본받아 그녀를 왕위에 옹립해 성심으로 받들라.”

진성여왕 직전에 신라 왕의 역할을 수행했던 사람은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이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경문왕은 진성의 부친이고, 헌강왕과 정강왕은 오라버니였다. 진성여왕은 겨우 1년 남짓 통치권을 행사하다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 ‘오빠’ 정강왕의 의지 덕택에 왕좌에 앉을 수 있었다.

사학자 이기봉은 그의 논문 ‘신라 진성여왕대의 재이(災異·괴이한 일과 재앙)와 농민 반란’에서 이와 관련한 해석을 내놓고 있다.

“진성여왕은 경문왕가(王家) 성립 이후의 왕권 강화정책과 왕실의 신성화 노력으로 즉위할 수 있었다.”

이에 더해 이기봉은 진성여왕 시기의 신라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도 요약해 알려준다. 아래와 같은 진술이다.

“진성여왕은 즉위 이후 곧바로 조세 면제 조치를 취했다. 계속된 서라벌 일대의 가뭄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정책이 백성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당시엔 이미 신라의 국가통제력이 상실되는 상황이었고, 이듬해 조세를 독촉하자 농민들의 반란까지 일어났다.”

실제로 그랬다. ‘통일신라’의 번영을 몇 대에 걸쳐 제대로 누렸던 서라벌은 9세기를 넘어서며 위기를 맞고 있었다.

반복되는 홍수와 가뭄은 민생을 곤궁에 빠뜨렸고, 귀족들의 욕심이 도를 넘어서고 있었던 것. 당연한 수순처럼 신라 각지에서 민란(民亂)이 발생했다. 진성여왕 한 사람의 잘못 탓만이 아니었다. 한국역사연구회에서 발행한 조경철의 논문 ‘신라의 여왕과 여성성불론’엔 이와 관련된 서술이 등장한다.

“진성여왕은 국내외적 상황이 어려움에도 나름대로 정치를 이끌어 나가려고 노력했다. 진성여왕 시기에 조세와 공물이 제대로 걷히지 않고 도적이 들고 일어났지만, 신라의 상황은 진성여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 이미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이 진성여왕대에 눈덩이처럼 불어나 더욱 어렵게 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다른 왕이 다스렸다 해도 몰락으로 기울고 있는 신라를 어찌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 많은 사람들이 진성여왕을 남자와 술을 좋아한 ‘음탕하고 정치 감각 없는 여성’으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그게 진성여왕의 모습 전부였을까?  /삽화 이찬욱  
▲ 많은 사람들이 진성여왕을 남자와 술을 좋아한 ‘음탕하고 정치 감각 없는 여성’으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그게 진성여왕의 모습 전부였을까? /삽화 이찬욱

◆ 진성여왕이 보여준 ‘긍정적인 면’도 살펴야

조경철의 지적처럼 9세 말 신라에 닥쳐온 위기상황이 진성여왕의 실정(失政) 하나만으로 야기된 것은 아닐 터. 하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이 ‘음탕함’과 ‘정치 감각의 부재’라는 진성여왕의 ‘그림자’에만 주목하고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녀에게도 ‘환하게 빛나는’ 일화 역시 없지 않다. ‘삼국사기’엔 아래와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진성여왕 시절 서라벌에 살던 처녀 지은(知恩)은 서른이 넘도록 혼인을 하지 않고, 장님인 어머니를 모시는 일에만 온 정성을 다했다. 하지만, 여자 혼자의 몸으로 모친을 제대로 공양하기가 쉽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지은은 부잣집에 자신을 여종으로 사달라고 읍소한다. 지은의 어머니는 딸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이 소식을 들은 진성여왕은 집을 마련해 모녀를 편히 살게 해주고, 군사를 보내 둘을 지켜주기까지 했다.”

이 에피소드는 진성여왕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이에 더해 진성여왕은 권력의 무상함을 일찍 깨닫고 자신의 조카인 요(嶢·효공왕)에게 왕위를 기꺼이 물려주기도 했다. 그때 그녀의 나이 겨우 20대 후반이었다. 욕심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간행한 ‘신라에서 고려로’엔 다음과 같은 서술이 실렸다. 이는 진성여왕의 ‘그림자’만이 아닌 ‘빛’도 함께 살피자는 이야기로 이해될 수도 있다.

“진성여왕에 대한 비난은 대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거나 남성우월주의의 편향된 시각에 기인한 바가 많다. 국가 멸망의 원인을 지배층의 무능과 실책 탓으로 돌리는 것은 보편적인 경향이라 하겠지만, 그것을 여자가 왕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하고 거기에 음란과 방탕이라는 올가미까지 씌워 비난하는 것은 가혹하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적절하지 못한 비판이나 오명을 덮어쓴다는 것은 마땅치 않다. 신라 쇠퇴의 원인에 대한 보다 객관적이고 엄정한 규명이 이루어져야 한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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