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벽두, ‘메시아’의 의미를 묻는 영화 2편과 함께

2024년 갑진년(甲辰年)이 열렸다. 전국 곳곳에서 혹한의 추위와 폭설 소식이 들려온다. 춥고 쓸쓸한 겨울은 올해도 과거와 다를 바 없다.

이런 날들이면 우리는 자연스레 위로와 위안을 선물로 들고 사람들 곁에 다가올 ‘메시아’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그 메시아가 어디서,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인지를 알기란 쉽지 않다.

아래 소개하는 2편의 옛날 영화를 보면서 스스로 사랑과 연민을 실천하는 메시아가 되고자 애써보는 올 한 해를 만들어가면 어떨까?

 

메시아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애니메이션 영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포스터. /영화 홈페이지
메시아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애니메이션 영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포스터. /영화 홈페이지

◆ 메시아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기타리스트 로이 부캐넌은 ‘더 메시아 윌 컴 어게인(The messiah Will Come Again)’을 연주했다. 일렉트릭 기타로 어쿠스틱 기타보다 더 맑고 청명한 소리를 뽑아내는 그의 연주 테크닉은 신기(神技)에 가깝다. 음악평론가들은 말했다.

“잔잔하고 때로 격정적인 그 곡을 듣는 동안 우리는 돌아온 메시아(구세주)의 음성을 듣고, 형상을 본다.”

그러나, 정작 메시아와 인간을 이어주는 매개 역할을 한 로이 부캐넌의 생애는 불우하고 불행했다. 마약과 알코올중독, 장기간의 투옥 중에 맞은 죽음까지.

신(神)의 고유 영역이라 이야기되는 ‘창조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은 평생 고독과 절망을 형벌처럼 머리에 이고 산다. 자신의 권위에 도전한 인간에게 내린 신의 저주 때문일까?

일본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바로 위에서 언급한 ‘메시아의 재림’에 관한 이야기다. “푸른 옷을 입은 채 황금의 들판에 내려서 잃어버린 대지와의 끈을 잇고 사람들을 청정의 땅으로 인도할” 신의 대위자(代位者)와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그리는 영화.

고도로 발달한 산업 문명의 끝에는 환경 파괴가 있었고, 그 파괴된 환경은 지구를 인간이 살 수 없는 별로 만든다. 지구 멸망.
 

메시아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애니메이션 영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영화의 한 장면. /영화 홈페이지
메시아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애니메이션 영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영화의 한 장면. /영화 홈페이지

이후 천년이 지났다. 지구는 여전히 오염된 대기로 덮여있고, 바다에는 생물이 살지 못한다. 설상가상으로 유독한 가스를 뿜어내는 식물들의 군락지 ‘부해’가 그 영역을 확장하며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살아남아 오염이 덜한 지역에 군락을 이루고 생활한다. ‘바람계곡’도 그런 도시국가의 하나.

나우시카는 그 나라의 공주다. 평지풍파의 시작은 ‘바람계곡’에 추락한 군사국가 토르메키아의 전투비행선에서 발견된 거대한 알(卵). 토르메키아는 지구를 멸망시킨 거신병(巨神兵)을 부활시켜 부해와 부해에 살고 있는 모든 곤충들을 불태워 버리려는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다.

볼모로 끌려가던 나우시카는 그 역시 토르메키아 병사들에게 부모와 누이를 잃은 페지테국의 왕자 아스벨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한다. 천신만고 끝에 유독가스를 뿜어내고 있다는 오해를 받고 있는 부해의 포자식물들이 환경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정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는 나우시카.

그러나, 늦었다. 부해를 태우려는 토르메키아의 공격이 이미 시작된 상태. 부해에 사는 거대한 변이곤충 ‘옴’ 수백만 마리가 바람계곡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공룡만큼 거대한 옴의 무리가 바람계곡을 지나간다면 마을은 폐허가 될 것이 뻔하다. 나우시카는 죽음을 각오하고 옴의 무리 앞에 나선다.

그 순간. 나우시카의 붉은 옷은 푸른색으로 변하고, 성난 옴들은 황금빛 들판처럼 고요하고 순해진다. 언젠가는 바람계곡을 찾아올 것이라는 성자(聖者)에 관한 전설.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희망처럼 전해지던 메시아의 재림. 메시아는 ‘나우시카’였던 것이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통상 하야오의 작품이 그러하듯, 환경 파괴와 산업문명의 무조건적 숭상을 경계하는 메시지와 모든 문제의 시작이 인간이듯 해결점도 인간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철학을 담고 있다.

“지나친 탐욕으로 자신과 세계를 망치는 것은 인간이다. 하지만 그 인간을 구원하는 것도 인간이다”라는 일견 단순한 논리. 쉽고 편안한 방식으로 전달되는 철학은 그 울림이 깊고, 지속성이 긴 법이다. 여기서 하야오의 탁월함은 그 형상을 구체화한다.

세상사를 단편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선과 악을 단순한 이분법으로 재단하지 않는 ‘소녀이자 ‘메시아’인 나우시카는 관객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혼돈스럽고, 피폐한 세상이지만 당신 안에 사람과 세상에 대한 사랑만 있다면, 메시아는 언제나 당신 옆에 있을 것이다.”
 

메시아는 어떤 형상으로 존재하는 것인지를 묻는 영화 ‘그린 마일’ 포스터. /영화 홈페이지
메시아는 어떤 형상으로 존재하는 것인지를 묻는 영화 ‘그린 마일’ 포스터. /영화 홈페이지

◆ 메시아는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지… ‘그린 마일’

감옥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영화의 소재로 쓰인 것은 이미 오래 전 일. 사람들은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궁금증이 크건 작건 있기 마련이다.

영화가 가진 미덕의 하나가 ‘인생의 대리체험’이라면 감옥 이야기를 다룬 영화는 감옥을 가지 않고도 감옥생활을 피상적으로나마 이해하게 하는 도구가 된다.

감옥영화의 소재는 매우 다양하다. 알란 파커 감독의 ‘미드나잇 익스프레스’나 프랭크 대러본의 전작 ‘쇼생크 탈출’처럼 탈옥을 다룬 작품, 케빈 베이컨과 게리 올드만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던 ‘일급 살인’처럼 감옥 내 인권문제를 다룬 작품, 짐 쉐리단 감독의 ‘아버지의 이름으로’처럼 아일랜드공화군(IRA) 요원의 감옥과 법정 투쟁을 다룬 정치적 영화까지.

그러나 누가 뭐래도 감옥영화의 백미는 사형수 이야기. 서두에서 말했듯 영화는 간접체험의 훌륭한 교과서다. 사형수의 일상과 심경이 알고 싶어 사형 선고를 받을만한 범죄를 저지를 수는 없는 일.

우리는 사형수를 다룬 영화를 통해 사형수의 일상과 마음을 읽고, 사형수를 연기하는 배우의 몸짓과 눈빛으로 사형수의 삶을 대리체험 한다.

‘그린마일’ 이전에 기자를 가장 크게 흔들었던 사형수 소재 영화는 팀 로빈스 감독의 ‘데드맨 워킹’이다.

“사람을 죽인다는 건 나쁜 일입니다. 그것이 살인이건, 사형이건…”이라 울먹이며 말하는 숀 펜의 눈망울에는 공포, 절망, 후회, 증오, 공황의 감정이 복잡하게 뒤섞여 흐릿해져 있다. 관객을 압도하는 그의 표정은 다시 보기 힘든 열연이다.

숀 펜의 연기만이 아니다. ‘데드맨 워킹’은 우리에게 “인간이 과연 인간에게 죽음을 선고하고 집행할 권리가 있는가?”라는 문제를 진지하게 성찰하게 한다.

서설이 지나치게 길었다. 이제 콜드 마운틴 교도소의 녹색복도(Green Mile)로 걸어 들어가자.

영화 ‘그린 마일’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거구의 흑인 존 커피(마이클 클락 던칸 분)가 소녀 살해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수 감방 사동으로 이송돼 온다. 교도관 폴 에지컴(톰 행크스 분)은 덩치만 컸지 순박하고, 겁 많은 이 흑인이 ‘과연 진짜 살인범일까’라는 의문을 가진다.

사막처럼 황량하고, 겨울 밤바다처럼 암울한 사형수 감방. 존 커피는 이 어두움의 공간을 신의 기적이 행해지는 빛의 공간으로 전이시킨다.

폴의 요도염을 고쳐주고, 교도소장 아내의 뇌종양을 제거해주는 신비한 치료술을 보여주는가 하면 악질 교도관을 단죄하는 심판자의 역할도 맡는다. 거기에다 죽은 쥐를 되살려내는 부활의 기적까지 행하는 존 커피.

 

메시아는 어떤 형상으로 존재하는 것인지를 묻는 영화 ‘그린 마일’ 속 한 장면.
메시아는 어떤 형상으로 존재하는 것인지를 묻는 영화 ‘그린 마일’ 속 한 장면.

그러나, 기적을 행하고 신의 존재를 대리했던 존 커피도 자신에게 씌워진 살인 혐의가 불러온 사형 선고를 뒤엎지는 못하고, 전기의자에 앉아 죽음을 맞는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이 육체인가? 영혼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은 고래로부터 있어온 것. 대러본 감독은 이에 답한다. “육체를 죽이는 행위보다 더 가혹한 것은 영혼을 절멸시키는 것이다”라고.

그렇기에 존 커피가 사형 선고를 받은 이유가 흑인에 대한 백인사회의 편견에 있건, 흑마술을 행하는 악마혐오증에 있건, 자기 의사를 정확히 표현 못한 존 커피의 무지에 있건 그건 이미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선량하게 살아온 한 인간에게 살인 혐의라는 무서운 의심이 덧씌워진 순간, 이미 그의 영혼은 파괴되는 것. 파괴된 영혼을 가진 인간에게 육체적 구원이란 무의미한 것이라고 감독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영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의 효과적 전달에는 마이클 클락 던칸의 연기가 크게 한 몫한다. 죽음을 앞두고 피할 수 없는 인간적 공포와 함께 세상사 앞에서 처연한 신의 평온함을 동시에 연기해낸 배우.

영화 속에서 3번이나 강조되는 존 커피의 대사 “제 이름은 존 커피입니다. 마시는 커피랑 철자만 다르지요”. 그랬다. 존 커피의 영문 이니셜은 ‘JS’다. 이는 예수(Jesus Christ)의 이니셜 JS와 같다.

자기희생을 외치는 사람은 많으나, 진정 아픔의 면류관을 자청해 쓰려는 사람은 없는 시대에 ‘존 커피’는 우리의 진정한 메시아가 아니었을까?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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