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안에 존재하는 ‘천사’와 ‘악마’, 어떤 걸 불러낼까?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이기적 욕망을 다룬 영화 ‘아모레스 페로스’ /영화 홈페이지

병적인 다중인격자 혹은, 괴이한 이상성격자에게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다. ‘인간’이란 존재 안에는 악마와 천사가 더불어 함께 숨 쉬며 살아왔다는 걸 부정하기 어렵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욕망을 제지하고, 이성에 근거해 살아야한다” “탐욕은 인간의 본성이니, 욕망을 거부하지 마라”는 정반대의 속삭임이 하루에도 여러 번 번갈아가며 당신의 귓가를 어지럽히지 않는가.

인간 내부엔 악마와 천사가 병존(竝存)한다. 소설가 이외수(1946~2022)는 생전에 아래와 같은 문장으로 욕심 없이 평화롭게 사는 방식을 독자들에게 설파했다.

‘누가 어진 마음으로 살라하여 그리 되더냐/가만히 두어도 어진 산비탈/오늘은 사과꽃 눈부시게 만발 하였으니/이런 날 도(道) 따위 닦아 무엇에 쓰리/영주 땅 가득히 엎질러진 햇살/부처님 진신사리(眞身舍利)도 녹아드는데’.

하지만, 세상을 여유롭게 바라보는 눈과 마음을 가지고 무욕(無欲)의 심경으로 살아가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외수의 문장이 머릿속에서 오래 기억되는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지.

예술의 주요한 역할 중 하나는 ‘인간에 관한 탐구’. 이에 동의한다면 사람을 ‘천사’가 아닌 ‘악마’로 살아가게 만드는 이유를 찾아보는 건 분명 의미 있는 행위다.

시인과 소설가, 작곡가와 화가는 문학과 음악, 그림이라는 각자의 장르 속에서 이런 탐구를 오랫동안 진행해왔다.

영화감독도 마찬가지다. 영상을 통해 연구되고 구현돼 온 인간 내부의 빛과 그림자는 관객들에게 ‘어떤 게 올바른 삶의 방식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했다.

멕시코의 영화 연출자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와 루이스 만도키는 사람의 선한 행위와 악행이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인지를 영사막 위에 펼쳐 놓은 사람들. 그렇기에 그들의 영화는 달리 말하면 ‘인간 본질에 대한 치밀한 탐구’라 할 수 있다.

‘아모레스 페로스’와 ‘엔젤 아이즈’는 꽤 오래전에 만들어진 영화. 그럼에도 두 작품이 던져주는 묵직한 메시지와 현재성은 2024년 새로운 한 해를 맞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할 듯하다.

인간 안에 존재하는 ‘천사’와 ‘악마’를 어떻게 다스리고, 유효적절하게 불러낼 것인지를 고민해본 이들을 위해 두 영화를 소개한다.

 

◆ 이기심은 악마를 만들어낸다… ‘아모레스 페로스’

피 흥건한 남아메리카 투견장(鬪犬場)에서 벌어들이는 돈으로 불륜에 빠진 형수와 도망칠 궁리에만 열중인 건달 옥타비오, 자신의 육체를 무기로 옥타비오를 유린하고 돈을 빼돌리는 형수 수잔나.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아름다운 모델과 딴살림을 차린 유명잡지의 편집장 다니엘, 자신의 전부인 아름다운 몸을 망친 교통사고를 비관해 히스테리만을 부리는 다니엘의 애인 발레리아.

몰락한 사회주의에 절망해 살인청부업자가 된 엘 치보, 이데올로기 때문에 어린 시절 자신을 떠난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하고 스스로 파멸의 길로 걸어가는 치보의 딸 마루.

“눈부시고, 유연하고, 또 날카로운, 그렇지만 가슴속엔 감흥이 전해오는 영화”라는 ‘피플’지(誌)의 평가를 받은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아모레스 페로스’를 관통하는 색채는 탁한 붉은색 혹은, 어두운 회색이다. 혼돈과 타락의 입구는 있지만 출구는 없는 도시 멕시코시티의 암울함.

감독은 그 암울함의 이유를 자신의 욕망만을 절대선(絶對善)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이기심에서 찾고 있다. 바로 이 이기심이야말로 인간 안에 존재하는 ‘악마’가 아닐까. 영화 ‘아모레스 페로스’의 등장인물들에게 자신보다 소중한 타인은 없다.

옥타비오에겐 형의 폭력에서 형수를 구한다는 명분이 있긴 하다. 하지만 매력적인 형수에게 느끼는 육체적 욕망 앞에 그 명분은 무력하기 짝이 없다.

형수 수잔나도 마찬가지. 그녀가 유혹의 눈길을 보낸 이유는 투견장에서 벌어오는 옥타비오의 돈을 차지하겠다는 물욕(物慾) 때문이었다.

다니엘과 발레리아의 관계 역시 다를 바 없다. 아무리 그럴듯한 수사를 갖다 붙이더라도 둘의 만남이란 아름답고 젊은 여자를 차지하려는 부유한 남자와 돈과 사회적 지위를 가진 중년 남성에게 매료당한 여자의 불륜일 뿐이다.

거기엔 사랑 따위의 단어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사랑이 아닌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 비극적 결말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할 터. 각기 다른 2개의 이기적 욕망으로 체결된 계약은 욕망이 어긋나자마자 깨진다.

이념을 따라 가족을 떠났고, 그 이념 때문에 감옥에 갇히고, 다시 그 이념에 절망하여 살인청부업자로 존재를 전이하는, 가족에 대한 배려라고는 전혀 없는 아버지 엘 치보.

그런 아버지를 인정할 수 없는 딸 마루. 두 사람 갈등의 시발점은 이념이다. 그러나 결국 이념이란 것도 좁혀 말하자면 ‘좋아하는 것으로의 이끌림’이라는 욕망이 아닐까? 그 이끌림이 사회주의를 향해 있건 자본주의를 지향하건.

영화 ‘아모레스 페로스’에는 유령이나 괴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2시간이 넘는 상영시간 내내 관객들은 뼛속 깊숙이 서늘한 공포감을 느낀다.

타인이 아닌 자신만을 향해 있는 이기적 욕망. 바로 그 욕망이 인간 내부에 도사린 가장 무서운 ‘악마’가 아닐지.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의 이유는 자신 안에도 존재하는 악마를 직접 바라본다는 고통 탓일 것이다.
 

◆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천사들의 세상… ‘엔젤 아이즈’

한국 영화팬들에게도 익숙한 ‘남자가 사랑할 때’와 ‘병 속에 담긴 편지’로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연출력을 인정받은 루이스 만도키 감독의 ‘엔젤 아이즈’는 앞서 만들어진 그의 작품들과 유사한 멜로 영화다.

‘엔젤 아이즈’는 전 세계 곳곳에 극성 남성 팬을 가진 매력적인 여배우 제니퍼 로페즈와 더없이 착한 눈망울을 가진 남자 제임스 카비젤이 서로의 가슴 안에 숨겨둔 상처를 극복하고 사랑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그린다. 그 과정에 ‘천사’가 개입한다.

LA 경찰청의 경관 새론(제니퍼 로페즈 분)은 시원시원한 성격과 꼼꼼한 일 처리로 동료들의 인기를 한 몸에 독차지하고 있는 여성.

언제나 환하게 웃는 얼굴로 생활하지만 그녀에겐 엄마를 폭행하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아있다. 그런 까닭에 남자의 사랑을 쉽사리 받아들이기 힘들뿐더러, 혼자 있을 땐 우울하다.

독거노인의 장보기를 대신해 주고, 길거리에 주차된 차량의 전조등까지 꺼주는 친절을 발휘하는 캐치(제임스 카비젤 분)는 법 없이도 살 착한 사람.
 

그러나 이 사내 역시 교통사고로 아내와 아들을 잃은 과거의 아픈 상처를 오랜 시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엔젤 아이즈’에 등장하는 천사는 존 트라볼타가 영화 ‘마이클’에서 보여준 우스꽝스런 친구의 모습이나, 빔 벤더스 감독의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처럼 철학적인 형상이 아니다.

‘엔젤 아이즈’의 천사는 뚜렷한 실체가 없다. 관념으로 존재한다. 천사는 ‘타인에 대한 이해와 배려’의 모습으로 흐릿하게 드러난다.

연민과 이타가 만들어낸 세상을 보여주는 영화 ‘엔젤 아이즈’의 한 장면.  /영화 홈페이지
연민과 이타가 만들어낸 세상을 보여주는 영화 ‘엔젤 아이즈’의 한 장면. /영화 홈페이지

남녀 주인공의 만남에서 보여지는 작위성과 동어반복으로 늘어지는 다소 느슨한 스토리 라인, 엉킨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의 통속성 등으로 보자면 ‘엔젤 아이즈’의 영화적 완성도는 그다지 높지 않다. 이런 형식적 허물을 상쇄해주는 힘은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다.

“인간으로 인해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가. 하지만 그 외로움을 달래줄 것도 결국은 인간뿐이다”라고 속삭이는 천사의 목소리.

결국 우리가 꿈꾸는 아름다운 세상이란 타인의 아픔도 자신의 것인 양 함께 앓아줄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곳 아니었던가.

그래서다. 새론의 눈물 섞인 고백만으로 갑작스레 이루어지는 아버지와의 화해와 큰 상처에 비해 너무나 쉽게 회복되는 캐치의 기억이 다소간 당황스럽고, 생경하더라도 관객은 이를 관대하게 넘겨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이유로 다툼과 싸움 끝에 마침내 화해한 두 사람이 함께 타고 가는 자동차 위로 떠오르는 엔딩 크레딧을 보며 천사의 축복을 내려줄 수도 있을 듯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인간 안에는 천사와 악마가 함께 살고 있다. 눈을 가린 경주마처럼 좌우도 살피지 않은 채 앞으로만 달려가려는 ‘이기적 욕망’과 이 욕망을 제지하려는 ‘이타와 배려’가 더불어 존재하는 것이다.

이를 부정할 수 없다면 당신은 천사와 악마, 이기와 이타 중 무엇을 곁으로 불러내려는가?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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